울릉도 북면 천부리 방앗간 맏며느리인 이태복 씨는 109세로 타계한 시조모와 암투병중인 시부를 40년 동안 정성껏 봉양하면서 부지런히 일해 기울어진 가세를 일으키고 이웃 어르신들에게도 따뜻한 마음을 베풀어 섬주민 사이에 효부라고 칭송이 자자하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했던가. 승선할 때만 해도 날씨가 멀쩡했건만 갑작스런 기상 악화와 높은 파고로 3시간이면 닿을 배는 5시간 반 만에야 울릉도 여객터미널에 뱃머리를 댔다. 배가 늦어지는 것쯤이야 섬주민들에겐 일도 아니지만 큰 이변이 아닌 이상 예상보다 2시간 반씩이나 배가 늦어지는 일은 드문 일이라고 했다. 날씨가 험악하면 코앞에 울릉도가 보여도 배가 회항한다고 했는데 그에 비하면 배가 섬에 들어온 것만으로도 그나마 다행이라고 안내를 맞은 군청 계장님이 긴장을 풀어주었다.
이태복 씨가 사는 곳은 여객터미널에서도 한 시간 가량 차량으로 더 들어가면 나오는 북면 천부리 마을이다. 가구가 200호 정도밖에 안 되는, 울릉도에서도 벽지에 속하는데 아직 미완성인 일주도로를 우회해서 가기 때문에 시간이 많이 걸린다고 했다. 서울에서 울릉도까지 반나절 사이에 육,해,공 탈것들을 모두 섭렵하고 나니 몸은 파김치가 됐지만 해안 도로를 따라 절벽에 피어난 해국들과 시원한 바닷가 풍광이 조금은 쌓인 피로를 풀어주었다.
‘옛선창 마을’이라는 입석을 지나쳐 얼마 지나지 않아 방앗간 앞에 차가 멈추었다. 방앗간이라고 해야 간판도 없고 큰 암석을 담벼락 삼은 좁은 입구를 지나야 경우 방앗간 내부가 보였다. 그래도 천부리에서 방앗간이라고 하면 으레 이태복 씨네 방앗간이다. 이곳에서 30년 가까이 방앗간을 열고 동네 사람 떡이며 곡식이며 고추를 빻아온 탓이다. 말그대로 동네 방앗간이니 이름이나 간판 같은 게 따로 있을 필요가 없을 만도 했다. "아이고, 이 먼데까지 오느라 힘들었겠네. 뱃멀미로 고생은 안 했어요?"

이태복 씨 내외가 한걸음에 달려 나와 손을 잡으며 반가움 반 안도감 반이 섞인 표정으로 맞아주었다. 산간벽지보다 먼 동해바다 외딴 섬으로 자신들을 만나러 객지에서 손님이 온다는 소식에 부부는 아침부터 손님 맞을 채비에 분주했을 터인데 올 시간이 한참을 지나도록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손님을 기다리느라 어지간히 노심초사했던 모양이었다. 작년까지만 해도 이태복 씨네는 시조모님과 시아버님, 아들 손주까지 5대가 한 집에서 함께 사는 대가족이었다. 그런데 웬일인지 집안팎이 썰렁하기 그지 없었다. 이태복 씨는 살림살이 도구들이 거의 다 빠져나간 빈 방에 걸려 있는 시조모님의 사진을 꺼내 보여주었다.
"작년 여름에 돌아가셨어요. 몇 년 더 사실 줄 알았는데 갑작스럽게 가셔서 아직 마음이 허전해요. 시아버님은 대장암 치료를 위해 막내 시동생 집으로 옮긴지 얼마 안 되요. 그리고 아들 내외도 지금은 분가를 시켰지요. "
1년 사이에 집안엔 많은 변화가 있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큰 사건은 이태복 씨가 40년 동안 지극정성으로 모셔온 시조모님의 죽음이었다.
"소변을 보시려고 하시가 넘어지셨는데 워낙 고령이시라 엉치뼈가 부러지셨어요. 병원으로 옮겨 치료를 받으셨는데 합병증이 생겨서 한달 반 만에 돌아가셨지요."
이태복 씨 내외와 마침 시댁에 들른 큰 며느리 모두 작년 여름 집안의 큰 어른에게 닥친 죽음이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난다는 듯 그때 이야기를 나누었다. 시조모님은 돌아가시던 해 나이가 109세로 울릉군은 물론 국내 최고령자다. 고령으로 거동이 약간 불편하긴 했지만 돌아가시는 해 봄에도 세 번이나 밭을 맬 정도로 건강하셨고 손주들 생일까지 기억할 정도로 정신이 멀쩡하셨다고 했다.
"우리 시조모님은 참 대단한 분이세요. 풍채가 좋으신 양반인데 평생을 소식하고 욕심을 부리지 않고 사신 분이에요. 정신력이 아주 강한 분이세요. 무엇보다 손주며느리인 저를 많이 아껴주셨는데 젊어 시집와서 제가 잘못을 해도 남 앞에선 절대 큰 소리 치지 않으시고 꼭 저 혼자 있을 때 야단을 치신 속 깊은 분이셨지요." 이태복 씨는 100살이 넘게 사시는 동안 병원 신세 한번 지는 법이 없었던 시조모님이 죽음을 앞두고 병원에 입원하셨을 때 내 생전에 그렇게 좋은 곳을 와보기는 처음이라며 어린아이처럼 좋아하시던 모습이 아직도 가슴 짠하게 생각난다고 했다.

먼 길 오느라 빈속일 텐데 허기가 질 거라며 어느 틈엔지 이태복 씨가 울릉도 별미인 ‘따개비 칼국수’를 내놓았다. 따뜻한 방에 앉아 몸도 녹이고 멀미도 가라앉히며 기운을 내란다. 긴 여행길 고생한 손님을 위해 한바탕 이런저런 부산을 떤 후에야 이태복 씨는 마주 앉아 살아온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울릉도 토박이 처녀 이태복 씨가 8남매의 맏아들인 남편 이범혁 씨 집으로 시집 온 것은 25살 때였다. 시댁은 당시 67세였던 시조모님과 시부모님, 미혼인 시동생들, 그리고 시집온 해 이태복 씨가 낳은 첫 아들까지 합해 모두 4대에 걸쳐 13명의 식구가 함께 사는 대가족이었다. 대가족의 맏며느리로서의 삶이란 굳이 말할 필요가 없었다. 당시에는 땔감으로 불을 때서 가마니 솥에 밤을 하던 시절이었으니 살림살이 고되기로 치면 지금과 비교도 안됐다.
매 끼니마다 어르신들 상하고 시동생들 아이들 따로따로 상을 차리느라 모두 4개씩 차려야 했다. 하루 동안 12번의 상을 차리고 설거지를 해야 했다. 그렇다고 살림살이에만 매달릴 형편도 아니었다. 시댁은 시아버님이 배를 사 원양어업으로 한때는 돈을 많이 벌었지만 이후 점차 가세가 기울어 형편이 어려워졌다. 이태복 씨는 집안 살림에 소홀함이 없으면서도 빚을 얹어 방앗간을 인수해 앞날에 대비했다. 부지런하고 일솜씨 좋은 이태복 씨의 방앗간은 문을 연 지 한두 해 만에 빚을 청산하고 나날이 번창했다. 훗날 남편이 물려받은 배 사업이 실패를 보는 바람에 가계 사정이 극심하게 어려워졌을 때도 방앗간이 있어 살림을 유지해나갈 수 있었다.
살림하랴 방앗간 일 하랴 눈코뜰새 없이 바쁜 와중에도 이태복 씨는 시조모님과 시부모님 봉양에 한치의 소홀함도 없었다. 안타깝게도 시어머님은 일찍 돌아가셔서 효도할 시간이 부족했지만 연로하신 시조모님 밑에서 살림을 배우면서 이태복 씨는 지극정성으로 집안 어른들을 모셨다. 고령인 시조모님이 치매에 걸리지 않도록 아침마다 부축해 산책을 시켜드리고 공중목욕시설 하나 없는 상황에서도 늘 따뜻한 물로 직접 시조모님의 목욕을 시켜드리고 방 청소며 빨래, 건강을 챙기는 일까지 세심하게 신경을 썼다.

"이 사람은 어디 이웃에서 좋은 음식 같은 거 했다고 하면 남편이나 자식보다도 할머님 드시게 할 생각부터 하는 사람이에요. 다른 집 사람들은 자식이나 남편부터 생각할 텐데 이 사람은 항상 할머니 밖에 모르더라구요." 남편 이범혁 씨가 서운함 반 농담 반으로 웃으며 말했다. 그랬다. 이태복 씨는 시조모님이 좋아하거나 건강에 좋다는 음식은 무슨 일이 있어도 꼬박꼬박 챙겼다. "한번은 건강하시던 양반이 양기 없이 시름시름 하셔서 눈동자를 보니 초점 없이 풀려있었어요. 그때가 107세쯤 되셨을 때인데 주변에서 그해 봄을 못 넘기겠다고들 했지요. 그래서 제가 소 꼬리를 푹 고아서 곰국을 끓여드렸는데 다음 날 눈동자가 다시 되돌아오고 원기도 회복하셔서 그 후로 몇 년을 더 사셨지요."
손주며느리의 지극정성이 통했던 것일까? 그 후 시조모님은 종종 곰국을 찾았고 그 덕분이었는지 건강을 유지하셨고 죽는 날까지 정신을 놓지 않으셨다. 시조모님은 노인복지관이나 이웃집에 마실 다니는 일을 좋아하셨는데, 이태복 씨는 그런 시조모님을 위해 종종 동네어르신들을 초청해 대접해 드리고 어려운 이웃에게도 따뜻한 마음의 배려를 베풀어 드리곤 했다. 그런 와중에 시아버님도 대장암 판정을 받아 이태복 씨는 두 어르신의 수발을 드는데 더 많은 정성을 쏟아야 했다. 한 집안의 맏며느리로써 집안 살림에 방앗간 일까지 도맡아 하면서도 어르신 봉양에 한치의 소홀함이 없도록 하려니 한창 때는 하루 2,3시간밖에 잠잘 시간이 없었다.
부족한 잠에 밤낮없이 몸을 혹사하다 보니 어느 새 이태복 씨도 퇴행성 관절염에 허리 통증, 골다공증 증세까지 생겨 몸 어느 구석 하나 아프지 않은 곳이 없다. 그래도 어르신 모시는 일에 단 한 번도 힘들다거나 불만을 털어놓은 적이 없다는 착한 며느리 이태복 씨. 백수를 넘게 누리신 시조모님이 돌아가셨을 때도 홀가분함보다는 서운함과 아쉬움이 많았다는 이태복 씨는 입관 전에 손수 시조모님 옷을 지어 곱게 입혀드렸다. 그리고 나서도 한동안은 시조모님의 빈 자리가 허전해 마음을 잡기 힘들었다고 한다. 그 갸륵한 마음이 하늘에 닿은 것일까?
이태복 씨는 삼성효행상이 돌아가신 시조모님이 맏손주며느리에게 주신 선물이라고 생각하며 기쁜 마음으로 받겠다고 했다. "효부라니요. 생각해보면 시집 떠나온 후 친정부모님께 효도 한번 제대로 하지 못한 미안함과 죄책감 때문에 시조모님과 시부모님께 더 잘하려고 노력했을 뿐이지요. 효도란 게 자식 된 도리로 당연한 일 아니겠어요?"
삼성복지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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