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3년 6월 일본 해상 보안청과 외무부 관리 30여 명이 독도에 불법 상륙해 ‘일본국 시마네(島根)현 다케시마(竹島)’라는 나무 표지판을 세우는 사건이 발생하자 이듬해 정부는 ‘대한민국 경상북도 울릉도 남면 독도’라는 영토 표지를 암벽에 깊숙이 새겨 넣었다. 사진 출처: 『격동 한반도 새 지평』(경향신문사, 1995)
종전 후 미국의 모순된 조치가 독도 갈등에 불을 지르다
1904년 9월 일본은 곧 다가올 러시아 발틱 함대와의 결전에 대비해 울릉도에 두 개의 망루를 세웠다.
이듬해 1월 일본은 2년 남짓 자행된 어부 한 사람의 무단거주와 조업이 국제법상 점령에 해당한다며 독도를 우리의 품에서 앗아갔다.
“일본은 폭력과 탐욕에 의해 약탈한 모든 지역에서 축출될 것이다.”
태평양전쟁이 그 종언을 고할 무렵 전후 일본 영토에 대한 연합국의 기본 방침이 천명된 카이로 선언(1943년 12월)을 통해 미국·영국·중국은 일본의 영토를 1868년 메이지 유신 이전으로 축소해야 한다고 결정했다. 이 선언의 정신이 지켜졌다면 독도를 둘러싼 한·일 간의 영토 분쟁은 없었다. 그러나 미국은 남한 점령 직후 독도를 한국령에 포함시켰음에도 불구하고 대일 점령정책을 펼치며 일본의 영토로 인정하는 모순된 조치를 취해 두 나라 사이의 갈등에 기름을 부었다.
“일본의 어업 및 포경업의 허가 구역을 설정하여 일본 선박 및 승무원은 금후 북위 37도 15분, 동경 131도 53분에 있는 독도의 12해리 이내 수역에 접근하지 못하며 또한 그 섬에 어떠한 접근도 하지 못한다.
” 46년 6월 22일 훈령 1033호에 의해 독도수역에서 일본의 어로 활동을 금지하는 ‘맥아더라인’이 그어진 후 미국이 대일 강화조약을 위해 47년 3월부터 49년 11월까지 만든 5차례의 초안 모두에 독도는 한국 땅으로 명시되었다.
“리앙쿠르트암(Liancourt Rocks, 독도)에 대한 일본의 주장은 오래되고 타당성이 있는 것으로 사료되며, 이 섬에 기상관측소와 레이더기지를 설치하는 안보적 고려가 바람직하다.
” 그러나 49년 11월 맥아더의 정치고문인 시볼드의 보고가 있은 후 미국은 6차 초안에서 독도를 한국 영토에서 누락시켰다.
“미국의 정보에 의하면 리앙쿠르 섬은 한국의 일부로 취급된 적이 한 번도 없고 1905년경부터 일본의 시마네현 관할 하에 있었다.”
51년 8월 러스크 국무부 차관보는 한국의 독도 주권 요구를 일축했다.
“일본은 한국의 독립을 승인하고 제주도·거문도·울릉도를 포함하는 한국에 대한 모든 권리·권원 및 청구권을 포기한다.”
한 달 뒤 맺어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서 독도는 한국에 반환되는 점령지 명단에서 누락되었다. 중국이 6·25전쟁에 개입한 이후 미국은 일본을 반공의 보루로 삼기 위해 독도 귀속 문제에서 일본의 손을 들어주었다. 52년 1월 이승만 대통령은 ‘맥아더라인’을 대체하는 ‘평화선’을 선포해 독도를 지켰지만, 그때 우리가 대미외교에서 일본에 완패한 것은 부인할 수 없다. 과거의 아픈 기억은 우리의 진로를 비추는 등대의 불빛으로 빛난다. 독도가 우리 땅임을 지지해줄 국제사회의 여론 조성이 더없이 필요한 오늘이다.
허동현 경희대 학부대학장·한국근현대사
중앙일보, 2010-4-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