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릉도의 안평전에서 태어나 장흥국민학교와 울릉중학교, 울릉종합고교를 나오고
곧 바로 서울에 상경하여 오로지 의류제조 하나만을 연구하고 도전하여
케쥬얼 업계에서 뛰어난 감각과 앞을 내다보는 예리한 후각을 갖고
일취월장하고 있을 뿐 만 아니라, 수 억원의 받을어음이 하루 아침에
휴지조각이 되어버려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일거에 몽땅 갚아버리는
배포가 큰 토종 울릉도 사나이.. 임종현(안평전 62년, 당회 부회장)향우의
일터를 찾아 가 보았습니다.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Q: 협진어패럴을 시작한 지가 얼마나 되십니까?.
A: 87년도에 공장부터 시작을 했으니까 꽤 오래되었군요. 무역업체로부터 하청을 받아서 봉제공장부터 시작을 했습니다.
Q: 요즈음 향우회 홈페이지에 향우들의 소식을 가급적이면 많이 실으려고 노력하고있는데. 그 일환으로 찾아 왔습니다. 울릉도에서 학교를 다녔을 터인데…
. A: 그럼은요. 태어나기는 안평전이었습니다 만은 장흥국민학교를 나오고, 울릉중학교, 울릉종고를 나왔습니다. 울릉도에서 학교를 다니고 마친 셈이지요.
방문중인 회장단
Q: 장흥국민학교에 다녔으면 그 당시에는 학교 옆 개울에 은어도 있었습니다. 특별히 과외활동이라도……
A: 예, 저도 기억을 합니다. 정말 깨끗한 물이 흘렀지요. 중학교 때는 특별히 취미라고 할까 별로 없었던 것 같습니다 만은 고등학교 때에는 학생회장까지 했습니다. 학생수는 한 학년에 180명씩 있었습니다. 지금은 입학생이 한 학년에 4~50명도 아니 되는 것 같더군요.
Q: 공부는 잘 하셨나요? 사업도 알차게 하시는 것 같은데 고향을 위해서 특별히 하시는 것이라도 있으면 소개해주시지요
. A: 공부를 잘했으면 아마 이 사업도 안 했을 겁니다. 고향을 위해서 특별히 하는 것은 없습니다 만은 한 4~5년 전부터 울릉종고의 신입생들에게 체육복을 보내주고 있습니다. 첫해는 전교생에게 다 주었습니다. 한 200매 되었지요. 그 이듬해부터는 신입생에게만 주고 있습니다.
임사장의 선행을 보도한 내용들
Q: 참으로 대단하시군요. 학생들이 참으로 고맙게 생각하겠습니다. 색상은 매년 다르게 디자인을 하는지요?
A: 예, 해마다 다른 색상의 체육복을 보내고 있습니다. 여러 학생들로부터 편지가 많이 왔습니다 만은 지금도 소중히 보관하고 있고, 간혹 이 편지들을 보면 참으로 보람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
학생들이 보내온 감사의 편지
Q: 지금도 계속하시고 있는지요?
A: 교장선생님한테 제가 체육복을 만드는 한 보내드리겠다고 약속을 했었는데, 한 때는 약속을 깰 수가 없어서 사서 보낸 적도 있었습니다. 지금은 종고의 학생 수가 얼마되지않고 하여 그냥 계속 보내드리고 있습니다.
Q: 부모님께서는 아직 생존하고 계신지요? 가족관계는 어떻게 되는지요?
A: 두 분 다 돌아가셨습니다. 형제는 9남매로 5남 4녀인데 위로 세분은 돌아가시고, 제가 막내입니다. 서울에 정성학 고문님이 저의 외삼촌이시구요.
Q: 고향 일로 마음 아픈 적은 없었던가요?
A: 마음이 아프다기 보다는 참으로 서운한 적이 있었는데 이런 말을 해도 되는지 모르겠네요. 다 지나간 일이긴 하지만. 약 4년 전 일입니다 만은 울릉도에 있는 형님으로부터 밤중에 전화가 왔어요. 막 우시면서 울릉군청인가에서 고발이 들어 왔다구 하더라구요. 그 당시 저의 부친께서 포항에서 돌아가셔서 부친의 유언도 있고 하여 울릉도에 있는 장지로 모시고 갔습니다. 그 전날이 일요일이어서 도축장에서 돼지를 잡을 수도 없고 하여 형님이 옛날 식으로 집에서 돼지 두 마리 잡아 조문객에게 드릴 음식장만을 잘 끝내었는데, 며칠 후에 도축협회의 누군가가 신고를 했고 철저하게 조사하라고 수 차례 압력을 넣었다고 하더라구요. 너무 화가 나더라구요. 제가 경찰서장님께 전화를 해서 영업목적도 아니고 장례 치를 음식이고, 마침 쉬는 날이기에 종전식으로 한 것인데 이럴 수가 있느냐고 했었지요. 그런 과정에 군청에서 또 협조요청이 오길래 제가 거절을 해버렸지요. 일요일이어서 도축도 안되고 그렇다고 장례음식을 준비하지 않을 수가 있습니까? 우리 정서로는 그런 것이지요. 정말 마음이 아팠습니다.
Q: 시대가 바뀌어 엄격한 잣대를 들이 댄 것이지요. 너무 상심 않으시는게 좋겠습니다. 그래 종고를 졸업하고 바로 육지로 나왔던가요?
A: 아닙니다, 졸업 후에 울릉도에서 2년간 군 업무를 마치고, 대학 준비도 하지않고 84년도에 그냥 서울로 올라왔습니다. 마침 정성학(당회 고문)씨가 제 외삼촌인데 서울에 있어서 그 인연으로 올라왔습니다. 지금은 없어졌습니다 만은 숙모님의 소개로 조그만 봉제회사에 입사해서 자재과에서부터 근무를 시작했습니다. 캐쥬얼을 만드는 제조회사인데 이곳에서 근무를 하다가 또 다른 곳으로 옮겼고, 87년 5월20일에 협진어패럴로 창업을 했습니다.
Q: 협진 어패럴을 창업하여 어떻게 진행이 되었는지 궁금하군요.
A: 처음에는 서울 수유리에서 생산만 했습니다. 판매라인도 없고 하니까 무역회사로부터 주문을 받아서 수출만 하다가, 바로 내수쪽으로 손을 대었습니다. 납품을 하기 시작했지요. 90년도인데 대부분 자켓입니다 만은 동대문 남평화시장에서 장사를 했습니다. 그때는 새벽 3시에 문을 열곤 했습니다. 부산쪽에서도 직원이 100명 정도 되는 공장에 하청생산도 하고 94년도에는 부산지사를 오픈하였고, 지금도 있습니다 만은 도매를 주로 하고있습니다.
집무실에서 열정적으로 포효하는 임종현사장
Q: 사업이 크던 작던 어려운 시기가 항상 있었을텐데, 제일 어려웠던 때를 회고해 주시지요.
A: 94년도인데 거래처로부터 받은 어음이 크게 부도가 나서 정말이지 어려운 시기가 있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큰 거래처에는 대부분 어음을 받고 물건을 팔았지요. 3개 회사에서 받을 어음 8억1천만원을 그냥 속수무책으로 부도를 당하고 말았습니다.
Q: 금액이 너무나 엄청나군요.
A: 예, 사실 앞이 캄캄했지요. 그 당시에 제가 젊은 나이이고 보니까 다들 저보고 이제 협진은 갔다, 울릉도 촌놈이 까불다가 망하니까 당연한 것 아니냐 하는 식으로 이야기를 하고들 했습니다. 주로 경쟁업체들이 이런 식으로 이야기를 퍼뜨리곤 하더라구요. 5억원 정도는 제가 돌리지않고 그냥 어음을 설합 속에 넣어두고 있었습니다. 그 이후에 약 1년 지나서 십원짜리 한장도 남기지않고 100% 다 갚았습니다. 제 가계수표를 3개월짜리 끊어주고 이를 막고 하는 식으로 결제를 해주었습니다. 그때는 장사를 잘 했습니다.
Q: 아니 1년 만에 빚을 다 갚았다구요? 정말이지 대단하십니다.
A: 8억원을 갚아 나가면서 이런저런 생각이 다 들더군요. 이 돈으로 차를 사면 몇 대를 살 수 있는데, 집을 사면 몇 채를 살 수 있는데 등 온갖 잡념이 생기더군요.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힘들었을 때가 그 때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부채를 갚는데 4천만원을 만원짜리로 가져갔는데 한 가방이더군요. 참으로 엄청나더라구요. 빚 갚는 마지막 날 울었습니다.
Q: 부도난 어음을 변제 받은 적이 있습니까?
A: 전혀 없습니다.
Q: 젊은 나이에 참으로 대단하시군요. 그래 요즈음의 현황을 말씀해주실까요?
A: 본사는 이곳이고, 부산에 지사가 있고, 동대문의 남평화시장에 매장이 있어요. 그리고 중국 천진에 지사가 있습니다. 작년에 규모를 축소하려고 하다가 직원문제가 걸림돌이 되어서 오히려 키워버렸습니다. 매장을 10개나 늘려 버렸습니다. 우리 섬유비지니스는 월드컵 하던 해부터 완전히 내리막이었습니다. 이동매장이 있습니다. 월세가 3백만원에서 2천만원까지 들어가는데 좋은 장소를 잡아서, 예를 든다면 일산의 로데오거리, 산본의 로데오거리, 의정부 시장쪽, 청량리역 건너편 등에 14개 있습니다. 작년 6월부터 본격화하여 움직이고 있습니다. 소매에서는 조금 적자가 났습니다 만은 재고 소진 등으로 꽤 필요하다고 봅니다.
중국에 진출했을 때의 어느 환영식에서
Q: 작년에 매출은 어느 정도로 하셨고 월간 고정비는 어느 정도인지요?
A: 외부로부터 사입도 하고 있습니다 만은 약 120억원 정도를 했습니다. 종업원이 한 50명 정도 있습니다. 부산에 2명, 소매라인에 30명, 동대문 2명, 사무실에 15명, 이러다 보니까 월간 고정비 지출이 약 1억7천만원 정도입니다.
Q: 원단은 한국에서 사서 중국 하청공장에 보내줍니까?
A: 한국원단을 가지고 가는 경우도 있고 중국에서 사는 경우도 있습니다. 매월 열흘간은 중국에 갑니다 만은 제가 중국에 사업장등록을 낸 것이 잘못된 것 같아요. 본인이 중국에서 직접 경영을 하면 모를까 정말이지 중국 관공서 사람들이 힘들게 합니다. 올해는 폐업하고 하청관리만 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중국에서 만들어서 소매까지 바로 직접하면 경쟁에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작업중인 공장 내부
Q: 디자인 등은 어떻게 하며 검사관리는 어떻게 하고 계십니까?
A: 디자인은 저희 디자인실에서 다 합니다. 제품은 원사이드 방식으로 하기 때문에 저희 회사직원이 상주하면서 검사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중국에서 100% 생산하고 있습니다. 요즈음은 바느질은 중국이 한국보다 더 잘합니다. 북한은 중국보다 더 잘하고요. 제가 북한의 공장에서도 만들고는 했습니다. 중국에서 몇 번 북한 사람을 만났는데 잘 놀고, 노래를 불러도 땀을 뻘뻘 흘리면서 결코 지지않으려고 하더라구요.
중국공장 내부
Q: 올해의 매출목표는?
A: 150억원에서 170억원 정도로 보고있습니다. 업종마다 다르겠습니다 만은 옷이라는 것이 마진이 보통 20%에서 25% 정도 보는데 재고가 많이 남기 때문에 매출과는 큰 상관이 없습니다. 재고 처리를 어떻게 하느냐가 중요합니다. 재고처리는 저희 매장에서 대부분 처리하고, 싼 것이나 불량제품 등은 동대문시장에 일요일이 되면 장이 섭니다. 여기서 소진하지요
.
Q: 가족관계는?
A: 집사람(유호연)과, 큰애 상훈(90년생), 둘째 상진(94년) 아들만 둘입니다.
왼쪽부터 상진군, 유호연여사, 임사장 그리고 상훈군
Q: 이제 큰 고비도 다 넘기고 앞으로의 전망을 어떻게 보십니까?
A: 저에게 큰 애로점이라면 항상 금전사고가 문제죠. 앞으로는 큰 사고는 없을 겁니다. 왜냐하면 지금은 어음을 받지 않습니다. 처음에는 거래처로부터 거부현상이 많았으나 지금은 모두들 수긍을 하고 그대로 따라주고 있습니다. 뉴코아의 어떤 거래처가 어음을 받으라고 제게 강권을 하다싶이 하더라구요. 그래서 제가 그랬죠. 우리 어머님이 살아 오셔서 이사람 어음은 받아도 된다고 해도 안받겠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조심을 하는데도 98년도에 뉴코아에 납품을 하다가 2억원 부도를 또 맞았습니다. 나중에 20%정도 회수를 했습니다 만은 또 한번 혼이 났습니다.
Q: 참으로 많은 고생을 하셨군요. 그리고 청년단의 초대회장을 하신 걸로 알고있습니다 만은….
A: 예, 99년도에 향우회 청년단을 결성하여 제가 초대회장으로 있었습니다. 큰 일은 못 했습니다 만은 초석을 만들어 놓았고 이제부터 청년단의 역할이 크게 기대가 됩니다. 잘 할 것으로 봅니다.
Q: 임사장과 장시간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정말이지 대단함을 느끼게 합니다. 젊은 나이에 열기가 넘치고 치밀하군요. 아무쪼록 열심히 하셔서 사업체를 탄탄히 하시고 향우회를 위해서도 많이 참여하여 주십시오. 감사합니다.
A: 네, 열심히 하려고 합니다. 향우회를 위해서도 자주 나가고 같이 돕도록 하겠습니다.
[ 대담 ] 일시 및 장소 : 2005년 3월15일 협진어패럴 본사 회의실
대 담 : 임종현(62년 사동) 협진어패럴 대표 참석자 : 홍상표(재경울릉향우회장), 전만술(재경울릉향우회 부회장), 배종수(사무차장)
[ 회사소개 ] 상 호 : 협진어패럴 대표 임종현 설립일자 : 1987년5월20일
주 소 : 본사/경기도 구리시 갈매동 24번지 031-573-0213
직영점 : 남평화시장 : 2층, 60호, 63호, 64호 02-2253-5829 청평화시장 : 1층 나열 16호 02-2236-5829
부산지사 : 051-331-8167
중국공장 : 天津市 南開區 紅旗南路 金谷園 溫泉小區 3-2-103
종 업 원 : 50명 년간매출 : 150억원 주요품목 : 캐쥬얼, 니트제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