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직생활과 한국냉장의 영업본부장을 거친 이후, 시와 글쓰기를 좋아하는가 하면 각종 괴목과 수석을 난과 어우러지게 하여 멋진 작품활동을 구상하고 있으며, 2,000 두 규모의 양돈장을 운영하며 사업과 취미생활을 동시에 만끽하고 있는 '산내들 농원' 대표 목부 '김창근 향우'를 찾아가 보았습니다.

*
Q: 예상했던 것 보다 축사가 꽤 큽니다. 전부 몇 마리나 되는지요?
A: 한 2천두 정도를 유지하고있습니다. 년 3~4회전을 하니까 년간 5~6천두 규모가 됩니다. 양돈장이다 보니 악취제거제는 씁니다 만은 냄새가 좀 납니다.
Q: 그렇군요, 농장에 냄새가 나야 돈이 되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이 대형 에어컨 같은 것은 무엇입니까?
A: 이건 사료를 배합하는 기계입니다. 서울의 몇몇 구청에서 나오는 음식물 찌꺼기 등을 받아서 첨가물을 가미하여 특수한 사료를 제조하는 기계입니다. 현재는 준비 중에 있고 곧 가동에 들어갑니다. 지금은 돈가가 워낙 좋아서 일반사료로만 사육하고 있습니다.

특수사료 제조기 앞에 서있는 김창근 향우
Q: 이 큰 싸이로 같은 것이 여기 저기 많이 보이는데…………
A: 네, 사료저장 탱크입니다. 벌크 사료를 이곳에 받아서 적정량을 급여하는 자동 시스템입니다. 여기 있는 것이 3개, 저 밑에도 2개가 있습니다. 한 탱크에 5~7톤이 들어가지요.

돈 사
Q: 아니, 돼지들이 모두 잠을 자고 있네요. 그 참 신기합니다.
A: 이놈 들은 원래 사료 먹고 물먹고 하루에 3~4시간 정도는 자야 살이 찝니다. 원래 겁이 많고 호기심도 많기 때문에 인기척에 놀라서 일어나고 경계심을 가집니다. 자주 들락거리면 스트레스를 받기 때문에 불 필요한 출입은 자제를 합니다.

통통하게 살찌우기 위해 달콤하게 낮잠을 자고 있는 돼지들.. ^ㅇ^
Q: 매일 이 농장에 출근을 하십니까?
A: 아닙니다. 농장에는 관리자가 상주를 하면서 매일 관리를 해주고, 저는 집이 용인이라 주일에 3~4일은 농장에서, 2~3일은 집에서 생활하고 있으며, 농장 시스템이 자동이라 힘든 일은 별로 없습니다.
Q: 고향 이야기 좀 해볼까요? 김사장 댁은 원래 현포였던가요?
A: 예, 본가는 태하 서달영이며 아버님 성함은 김주석 입니다. 어른들이 왜정 때 태하에서 사시다가 현포로 와서 농사를 오래 짓다가 양조장을 했습니다. 형제는 4남 3녀이며 제가 장남입니다. 아버님이 23년생이고 쉰 아홉에 일찍 돌아가셨고, 어머님께서도 5년 전에 돌아가셨습니다.
Q: 네 그렇군요. 학교는 부산에서 다니신 걸로 알고있는데……
A: 예, 현포에서 국민학교를 졸업하고, 도동에 와서 울릉중학교(15회)를 나왔습니다. 그때는 중학교가 도동 한곳 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울릉수고에 입학해서 다니다가 2학년 2학기 때에 부산으로 전학을 했지요. 아버님께서 “니는 장남이고 집안의 기둥이니 대학에 가야 된다”고 해서 육지로 전학을 보낸 것이지요. 아버지가 양조장도 하고 경제적으로 다른 집 보다는 좀 나았다고 봐야지요. 보통 대구쪽으로 많이 갔는데 그때는 울릉도 사람들이 상거래 관계상 부산으로 많은 내왕을 했지요. 경제적으로 급할 때 울릉도사람에게서 쉽게 융통해 쓰라고 했는지 부산으로 보내더라구요. 그래서 동아고등학교를 졸업했지요. 임채윤 선배가 11회이고, 내가 13회, 김유근이가 14회입니다.
Q: 아, 그렇군요. 그럼 농장경험은 전혀 없이 했습니까?
A: 아닙니다. 시흥에서 순전히 재래식으로 500두 규모로 약 1년간, 안성에서 2년간 사육을 하여 3년 정도의 경험을 바탕으로 작년 7월에 인수를 하여 이곳 천안까지 왔습니다.
Q: 그리고 아버님께서는 현포에서 양조장만 하셨습니까?
A: 아버님께서 면의원, 군의원, 수협에 이사로도 있었고 현포 방파제 유치 때문에 초기에 꽤나 열심히 뛰었던 것으로 알고있습니다. 농림부, 수산청 및 중앙의 관련부서를 여러 번씩 출입을 하면서 향나무 괴목을 비롯한 여러 선물들을 들고 다니면서까지 인사도 하고,설득하고 이해시키고 해서 결국은 수산청 지정항으로까지 확정짓는데 기여를 했다고 생각하며, 현포항(축항)을 유치하시느라 고민하시는 모습을 늘 보았습니다. 수산청 지정항으로 결정되었다는 통보를 받고는 물심양면으로 도와주신 동네 어른들을 모시고 술대접을 하면서 몹시도 흥분해 하시던 그 모습이 지금도 어른거립니다. 다 지난 옛 이야기지요.
Q: 대학교 생활 이야기 좀 해보실까요?
A: 뭐, 특별히 기억에 남는 일도 별로 없습니다. 자취도 하고, 하숙도 하고, 아르바이트로 애들을 주로 가르치곤 했지요. 동아대학교 법대에 들어갔는데 그때는 공부 잘 못해도 줄만 서면(?) 다 들어간 것 같아요. 학교에 다닐 때는 아버님이 재정적으로 큰 어려움이 없었습니다. 실은 그 당시에 대학 보내려면 큰 돈이 들었습니다. 특히 서북면 쪽에서 육지로 대학에 간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웠습니다. 65년도에 입학을 하고 72년에 약 8년 만에 졸업을 했습니다. ROTC를 6개월 하다가 3학년 1학기를 마치고 바로 군에 갔습니다. 부산 광안리에서 근무를 했는데 잘 아시겠지만, 그 당시에는 부대배치가 백이 많이 좌우했지요. 내 줄에 유명한 사람 아들이 있었는데, 내가 그 친구 줄에 끼어 가지고 25명이 몽땅 부산 육본 직속의 측지부대에 떨어졌지요. 저는 행정담당을 했지만 이 부대는 육본작전 지도를 만드는 부대였지요. 딴 사람들에 비해 좀 편하게 군대생활을 한 것 같아요.
Q: 그럼 결혼은 군대에 있을 때에…….
A: 아뇨, 중등교사시절때 좀 늦은 서른에 하였습니다.

부인 최문옥 여사와 함께 다정한 모습
Q: 제대를 하고 바로 취직을 하였습니까? 졸업을 늦게 한 것이 궁금하네요.
A: 군대를 마치고 바로(70년 6월) 울릉도로 들어갔습니다. 그때 집에서 배 사업도 하고 해서 제가 사무장을 하면서, 일년정도 오징어도 잡고 배일도 거들고 하다 이왕 시작한 것인데, 학업은 마쳐야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복학을 하고 졸업은 73년에 했습니다.
Q: 졸업을 하고 어찌했습니까?
A: 늦었지만 졸업을 하고 중등학교 선생을 했습니다. 요즘은 선생하기가 어렵지만 그때는 딴 것을 추진하다가 잘 안되면 선생질이나 하지 하는 말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혹시나 하고 교직과목을 이수했고, 첫 발령은 총각 때이고 해서 희망하는 곳이 몇 군데 있었습니다 만은, 거제도로 희망하여 거제군에 있는 연초중학교(공립)에서 일반사회를 맡았지요. 시골이니까 보통 두서너 과목을 가르쳤습니다. 어떤 학기에는 세과목까지도 한적이 있었지요. 국어도 희망해서 수업을 했습니다. 바다도 좋아하고 문학에 관심도 있고해서…고등학교 때 밀양문화제등에서 입선도 두번 정도 한 기억이 납니다. 학교는 계속해서 경남교육위원회 산하에서 10년 정도 근무를 하다가 교직이 적성에 맞지 않았어요. 그러던 차에 국가 기업인 한국냉장에 경력사원으로 입사를 하여 부산지사에서 근무를 했지요. 처음에는 포항제철에 응시를 했으나 후순위라서 한참을 기다려야 할 형편이고 해서, 잠깐 들어가 우선 근무나 해보자고 한 것이 그냥 계속 다니게 되었습니다.
Q: 한냉은 주로 무슨 일을 하는 업체 입니까? A: 공기업이다 보니까 농수축산물의 수급을 조절하는 것이 주 목적이었지요. 90년대 초에 서울본사에 근무할 때 당시 울릉농협 정종태조합장과 울릉도에서 생산되는 청궁과 같은 한약재 등을 정부자금으로 수매해 보려고 자주 만나 협의한 적도 있습니다.
멋진 목부작이 되기를 기다리는 농장 뒷 산에서 모은 괴목들
Q: 웬 괴목을 이렇게 많이 모아두셨는지, 난도 있고,
A: 예, 제가 취미가 다양해서 난이나 야생화, 분재 전시회나 수석 전시회가 있으면 어디든지 가서 한수씩 배우고 옵니다. 여기 모아놓은 것이 뒷산에서 주워 모은 것입니다. 요것들을 갈고 닦고 조각칼로 파고해서 풍란, 이끼. 야생초 같은 것들을 적절히 심고 조화를 맞추어 작품을 만들지요. 요즘은 분경에 더 신경을 쓰며 대충 만들어 진 것이 2백여점 정도가 되지요. 특히 수반에 분경을 만들어 볼 때는 그리운 고향산천, 고향의 탁 트인 바다를 가슴과 머리 속에 떠올리며 만들어 봅니다.
정성들여 손질한 괴목과 난, 야생초들이 만나 아름답고 멋진 작품으로 완성
Q: 취미가 다양하시군요. 참으로 놀랐습니다.
A: 본래 취미는 낚시입니다. 특히 밤낚시를 좋아하지요. 칠흑 같은 까만 밤에 풀벌레소리 들으며 파란 캐미라이트 불빛을 쳐다보며 생각도 하고 헝컬어진 마음에 빗질이라도 할 수 있는 공간이 좋아서지요. 휴전선 가까이 외진 곳으로 갔다가 검문을 받은 기억도 여러 번 있었지요. 25년 정도 낚시하면서 월척은 두마리 밖에 못 했지요. 요즘은 거의가 떡붕어나 중국 붕어라서 월척의 의미가 없지요. 어디 토종이 있나요? 앞으로는 더 어렵겠지요.
Q: 한냉에 근무를 할 때 이야기 좀 해주실까요? A: 98년도 국민의 정부 때 민영화가 되었을 때, 제가 선발대로 회사를 나왔지요. 물론 명예퇴직금도 좀 더 있었고 해서… 한냉근무 20년 만에 영업본부장을 마지막으로 마쳤지요. 수도권 전체 영업(정부물자 수급조절)은 제가 책임을 지고 했고요. 한냉은 전국에 서울본사를 중심으로 서울공장, 부산공장, 목포, 삼척, 청원에 공장을 두고 있었고 사원들은 약 1800명 정도였습니다. 그리고 물가수급조절을 위하여 각 지역별로 물량 밸런스를 잘 조절해야 합니다. 지방의 것을 서울 부산으로, 서울 물량은 때에 따라서는 지방으로 보낸다든지 하는 컨트롤하는 것이지요.
Q: 한냉을 그만두고 바로 농장을 하였나요?
A: 아닙니다. 98년도에 그만두고, 이것 저것 고심을 하다가 서초동에서 독서실을 했습니다. 일년반을 했습니다.수익은 좋았는데 철저하고 체계적인 관리를 위하여 사람을 안쓰고 우리 부부간에 직접운영을 하다 보니, 너무 힘이 들고 개인시간이 전혀 없었어요. IMF 바로 후니까 권리금도 없이 제가 컴퓨터시스템 등 최신시설을 하였으며, 입실시키는데도 불량해보이는 학생은 좌석이 있어도 안 받고 성실하게 하다 보니까 소문도 나고 해서 짧은 기간 안에 예약까지 받을 정도였지요. 그러나 아침 9시에 문열어 새벽2시에 마치니, 잠도 제대로 못자고 사회생활이 엉망이더라구요. 마치고 집에 오면 3시고 아침 6시에 청소를 하고 낮에는 좀 자야 하는데 그게 잘 안되고, 또 여학생들은 내차로 태워다 주어야 하고……..돈벌이도 좋지만 할 일이 아니더라구요. 강남의 아줌마들이 얼마나 극성입니까? 소문이 났지요. 저집 아저씨는 중등학교 선생을 했다더라, 아줌마가 인생상담도 해준다더라 등등…..담배를 피운다든가 조금이라도 말썽부리면 받은 돈 내주면서 퇴실을 시키고 하니 좀 먹혀 들어간 모양입니다. 그 당시에는 월간 십만원씩이고 좌석이 120석이니 그런대로 괜찮았지요. 그러던 차 계속 넘겨달라는 사람이 있어서 상당액의 권리금을 받고 넘겨버렸지요.
Q: 계속해주시죠….
A: 그 다음에 축산유통을 하려다가 자금도 조금 딸리고 해서 시흥에 있는 그린벨트 안에서 돼지사육을 조금 시작을 했고, 안성에 가서 2년 정도 하다가 음식물 배합사료 공장을 동업하려고 했으나 지분관계가 맞지않아서 포기하고 단독으로 현재의 천안에서 시작을 한 것이지요.

김창근 향우
Q: 새끼돼지를 어떻게 키워서 판매를 하는 것인지요?
A: 25 키로 전후의 자돈을 사다가 키웁니다. 양돼지 종자로 3~4개월 정도 키워서 출하합니다. 110kg나 120kg가 제일 알맞지요. 월간 300~400두 정도 입식을 하고 그 만큼 출하됩니다. 요즈음은 돈가가 계속 고공행진을 하니 기분은 좋습니다. 돈가가 하락할 때를 이미 준비하고 있습니다.
Q: 취미도 다양하시고……. 앞으로의 계획은? A: 계획은 좀 더 변두리로 들어가서 일괄사육을 할 계획입니다. 돼지 종돈을 가지고 새끼도 직접 생산하고, 특수사료를 이용해서 제대로 한번 해보고 싶습니다. 우리나라의 축산물 자체가 등락이 워낙 심하니까 일괄로 해서 가격 하락시를 상시로 대비하자는 것이지요. 순수 한우까지 해볼 생각이고, 움막짓고 낚시도 하고, 하우스도 지어 분재도 분경도 하고……..
Q: 제일 큰 문제가 병일 것으로 생각합니다 만은….
A: 들어오실 때 보셨겠지만 차량이 들어오면 자동으로 약제 소독액이 분무가 됩니다. 병이 제일 큰 문제입니다. 물론 보험도 있고 합니다만, 요즘은 농림부에서 구제역 등 여타 질병으로 인한 손실은 기본적인 보상을 해주고 있습니다만 정상적인 사육보다는 못하지요. 어느 한곳에 질병이 발생하면 금방 확산이 되니까 방역,소독이 제일이지요. 병의 확산도 일일 생활권인 것 같아요. 내방객들도 일체 돈사에 접근을 못하게 하지요. 요즘은 이틀에 한번꼴로 소독을 합니다.
Q: 가족관계는?
A: 애들은 딸만 셋입니다. 민정이(77년), 민지(80년), 수정(82)이 모두 미혼이고, 집사람 최문옥 이렇게 다섯입니다. 완전히 딸부자입니다 그려. 큰 애는 서울에 있는 외한카드사에 다니고 있고, 둘째는 신용보증기금에 다니다가 사내결혼 예정으로 일단 쉬고 있고, 막내는 산업디자인과 나와서 디자인회사 다니고 있습니다.

가족과 함께 한 어느날
장시간 인터뷰에 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더욱 정진하시어 원하는 꿈이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후배들을 위해서 홈페이지에 좋은 글도 많이 남겨주시기 바랍니다. 오늘 일하시는 모습을 보고 나니까 참으로 기분이 좋습니다.
[인터뷰] 일시 및 장소: 2005년 6월 7일, 천안 “산내들 농원”
면 담: 김 창 근 (현포 46년, 산내들 농원 대표목부, 당회 향우)
대 담: 홍상표 재경울릉향우회 회장
[회사소개] 회사명: 산내들 농원 (011-213-6923, FAX:041-554-6868) 주 소: 천안시 풍세면 삼태2리 27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