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좁은 섬에서 이대로 주저앉을 수는 없다고, 어린 나이에 과감히 육지로 뛰쳐나와 온갖 고생 끝에 이 땅에 “산업용 안전보호용구”라는 단어가 생소할 때 이 분야에 일찍이 뛰어들어 무에서 유를 추구한 의지의 사나이로서 38년간 오로지 한 우물만 파고있는 [주]한국세이프티를 경영하고 계시는 임병환 고문님의 직장을 찾아가 보았습니다.
홍: 안녕하십니까? 오랜만에 뵙는군요.
임: 어서오십시요 회장님! 향우회를 맡아서 큰 고생을 하십니다.
홍: 향우회라는 것이 뭐 별난 일을 하는 것이 아니지요. 특히 울릉도향우회는 울릉도라고 하는 외로운 섬에서 나온 혈연 같은 동질감을 갖고있는 것이 여느 향우회보다도 참으로 다른 것이지요. 그러나 젊은 세대들이 선배세대와 자꾸 단절이 되고 하여 저는 홈페이지를 통하여 향우들에게 모든 정보를 주어야겠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특히 젊은 향우들이 의외로 많이 이곳 수도권에서 활발하게 활동을 하고있는 것이 감격스러워서 이를 꼭 알려주어야 겠다, 선배들의 발자취도 소개해 주고, 향우들에게 용기를 불러 일으켜줄 수가 있다고 생각을 해서 현재 시간이 닿는 한 이렇게 하고있습니다.
임: 그래요. 향우회도 많이 발전을 했습니다. 저도 향우회 초창기에 재무간사도 맡아보고 했지요. 저의 집에서 밤을 새워 음식도 만들고, 여러가지 준비도 하곤 했습니다. 래서 광주 냇가 어딘가에서 야유회도 했었지요.
홍: 예. 저도 그때 참석을 했습니다. 돼지국밥도 먹고 참으로 오래 전일이지요. 그래서, 그 일환으로 향우들의 일터를 제가 대표로 방문하고있습니다. 특히 임병환 향우께서는 젊은 향우들에게 큰 모범이 될 수 있는 사례가 되겠기에 이렇게 찾아 왔습니다. 이 사업을 언제 시작했습니까? 제가 학교 다닐 때 임회장께서 명동에 조그만 사무실을 얻어서 일할 때부터 입니까??
임: 아닙니다. 바로 명동 사무실로 가기 전에 전화도 없고 하니까 가정집에서, 동업자의 친척집에서 전화를 빌려서 쓰기로 하고 거기서부터 시작을 하다가 명동으로 옮겼지요. 명동에서 약 2년 정도 있었습니다.
홍: 내 기억으로는 그 명동 사무실이란 것이 제대로 된 사무실도 아니고 계단에다 임시로 만든 것 아니었습니까?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하고있습니다 만은……….한 평인가 하는 조그만.....,
임: 아니에요. 사무실은 한 10평도 정도가 있었고, 각자가 한 두평씩 쪼개어서 칸을 만들어서 사용했지요. 그 때는 전화값도 비싸고 하니까 전화를 받는 여직원 한 사람이 너댓개의 회사일을 동시에 본 셈이지요.
홍: 임회장께서는 무슨 동기로 이 사업을 하게 되었습니까??
임: 향우회의 허욱 전회장이 노동청에 계실 때인데 노동청의 산업안전계장이 유럽출장을 다녀와서 종합카다로그를 하나 가지고 왔더랬어요. MSA라는 카다로그인데 이게 소위 안전관리에 필요한 각종 기구가 대부분 들어 있는, 그 당시로서는 생소한 것이었지요.그래서 모두들 앞으로 한국에서도 반드시 이 사업은 될 것이다 이렇게 해서 시작이 된 것이지요.
홍: 카다로그만 보고 바로 시작하였습니까?
임: 그 당시에는 공단도 없었고 섬유공장이나 방직공장 정도 밖에 없을 때인데, 노동청의 사무관 다섯 명하고 주주가 되어서 같이 한번 해보자고 하더라구요, 그래 각자 십만원씩 내어서, 그때가 68년도인데, 시작을 했지만 전혀 매출이 없으니까 안되는 거요. 그러니 딴 사람들은 전부 포기를 하더라구요.
홍: 그 당시 월급이 3만원이나 5만원 정도일 때인데……십만원씩 투자를 했으니 꽤 큰 금액인데….
임: 그래서 내가 맡아 하기로 했지요. 69년도에 내가 맡아서 했는데 돈이 없어도 할 수 있었어요. 한번 간 거래처는 몇 번이고 계속 다녔지요.주로 경인지역인데 버스타고 여기저기를 계속 해메고 다녔지요.시외버스를 타고.
홍: 그 당시의 이 기구를 사용한 업종은?
임: 주로 건설과 중화학 업종이고 대부분 초기에는 장갑정도와 마스크 정도였지요. 생산공장에서 자꾸 재해가 발생하니까 노동청에서도 귀마개, 마스크 등을 사용하는 법을 만들어야 겠다고 해서 박대통령이 공단을 만들었을 때인데 구로3공단의 각 공장에서 안전관리실을 두었고 안전 담당관이 생겼습니다.
홍: 우리나라의 안전관리라는 것이 처음 시작된 셈이네요?
임: 그런 셈입니다. 한번은 공장을 돌아다니다가 동국제강에 들어갔는데, 담당자가 하는 말이 사고가 잦은데 뭐 안전기구가 없겠느냐고 하더군요. 철사를 만드는데 팔다리가 잘려 나가고 하니까 대책이 필요했던 것 같아요. 무엇을 만들면 좋겠냐고 묻길래 그래서 각반을 만들어보자고 했지요. 동대문 시장에 가서 재료를 사다가 직접 만들었습니다. 헝겊에다 대나무를 중간중간에 넣고 봉제를 하여 납품을 했습니다. 그래도 전혀 매상이 없었어요. 이런 식으로 그때그때 공장에서 필요한 제품을 만들기도 하고 구해서 납품도하고 하니까 돈은 안되고 죽을 지경인데 차츰차츰 안전기구의 전문가가 되어가기 시작했어요.

38년간을 지켜 온 청계천 점포의 정면
홍: 조금씩 안전기구 업종에 빠져든 셈이군요?
임: 그때 어느 큰 공장인데 경비실에 가서 안전담당을 좀 만나러 왔다고 하면 무조건 안된다고 해요. 한 여름이니까 땀이 비오듯이 나지요. 경비실에 가서 좀 쉬어가자고 하고서는 담배도 한대 권하고 하여 친해놓고서는 그 사람이 경비를 볼 때에 다시 가서 안전사고가 많은데 재해예방을 하기위해서는 이것 꼭 필요할 것이다 담당을 만나게 해달라고 해서 겨우 통과해서 만나서 설명을 하곤 했지요.자기들도 사고가 많으니까, 품의를 한번 올려보겠다고 해서 이런 식으로 연결이 된 것이죠. 일단 주문이 나한테 오기만 하면 놓치지않고 계속 관리를 하는 것이지요.내가 공부를 많이 했습니까 세일즈에 관한 책을 많이 읽었습니까? 오로지 몸으로 뛰는 거였지요.
홍: 그래 주문이 나오기 시작했구요?
임: 예,주문만 나오면 나는 절대 안 놓치지요. 인천의 공구업자들이 나 때문에 장사를 못할 정도였으니까요. 내가 워낙 열심히 공장을 누비고 다니니까 말입니다. 시외버스를 타고 인천에 가서 아침 9시부터 각 공장을 돕니다. 그래 새로운 거래처 하나 개발해놓고 보면 점심시간이라 빵 한 조각에 우유하나 마시고, 부평 가면 한시에요.그래 또 다니는 거지요, 저녁에 다시 서울로 올라 오고 이 생활을 4,5년간 계속했습니다.
홍: 그래 조금씩 매출이 오르던가요?
임: 그럭저럭 하고 있는데 각종 공단들이 여기저기 생겨나기 시작을 하더라구요. 아마 72년 초가 피크였던 것 같아요. 무엇이던지 물건만 만들면 납품이 되는 거에요. 예를 들어서 인천조선에는 월 1억원씩 들어갔어요. 가죽치마, 가죽조끼, 가죽장갑, 마스크 귀마게 등등 …..
홍: 그 때는 입찰제가 아니었습니까?
임: 예,년간 계약을 했지요. 입찰은 없었고, 지하실에다가 사람을 데려다 놓고 원단을 사서 만드는거요.
홍: 기준도 없이 그냥 만드는 겁니까?
임: 정부의 지침, 규정도 없고 막 만들면 다 팔았습니다. 박대통령 시해사건 전후에 화이버를 생산한적이 있었습니다. 하남에 있던 공장인데, 알미늄 화이버를 만드는 공장인데 제가 인수를 해서 겨울 내내 만개를 만들었어요. 울이 지나자 데모가 터지고 화이버가 없어서 못 팔 정도였으니까요.
홍: 화이버를 만들려면 기술도 필요할 터인데…
임: 계속 해오던 사람이 미국 이민을 가게 되어서 제가 직원들하고 전부 인수를 했기 때문에 별 애로는 없었습니다.
홍: 재미를 많이 보았겠네요?
임: 그래요. 좀 재미 보았어요. 그 당시에 정성학 선배가 청와대에 계실 때인데 박대통령이 공장에 시찰을 가는데 모자가 필요할 것이고 모자를 만들어야 하는데 사이즈를 몰라서 알려달라고 해서 주문품을 만들었지요. 정성학씨에게 봉황을 그려야 되느냐고 하니까 번거럽다고 하길래 그냥 만들어 준 일도있어요. 하남공장에 애들 맡겨놓고 보니 시간되면 가버고 관리가 안되더라구요. 그래 할 수없이 공장을 전세를 주고 지금도 주고있지만. 이 후에 FRP, PVE가 나오고 계속 어음만 들어오고 현금은 나가고 그래서 정리를 하고 판매만 하고있지요.
홍: 아이템이 꽤 많은 것 같은데 취급품목이 몇 개나 됩니까?
임: 수 가지가 넘습니다. 열처리, 장갑만해도 수도 없습니다. PVC 에프론 등
홍: 저도 연합유리에 근무를 할 때인데 상계동에 삼양라면에 다닐 때 그 때 현장에서 같이 만났지요? 입찰이 있어서 왔다고 한 기억이 나는데…...
임: 아 그 때 홍회장과 만나곤 했지요. 마스크, 납품 때문에 돌아다닐 때지요. 안 들어간 곳이 어디 있나요?
홍: 지금 영업은 어떻게 하나요?
임: 지금은 많이 바뀌었어요. 한화는 30년 거래처이고 삼성전자, 삼성코닝에도 납품을 하지요. 큰 회사에 많이 들어가지요. 그런데 부도도 많이 맞고 한라조선에 큰 부도를 맞았지요. IMF 때 월 3억씩 어음을 받았는데 정신이 없더라구요. 애는 미국에 공부하려 가있지. 환율은 1800원대였지. 결국은 융자를 받고 해서 문정동에 있던 건물하나 있던 것 팔아치우고. 빚도 갚고, 9억원 정도인데 사실 며칠 망설이다가 터뜨려버릴까, 며칠 망설이다가 이렇게 살면 안되겠다고 해서 건물도 팔고 다 정리를 했습니다. 지금은 월 2억 판매도 하기 힘듭니다.

홍: 그래도 해오던 기반이 있으니까 판매가 꾸준할 터인데…히트 상품이라도..
임: 오래 하다고 보니까 유한킴버리에서 산업용품을 만들고 있었는데 이게 현재는 효자 상품이 되었습니다. 화장지만 만드는 회사인줄 알았는데 이걸 만들더라고요. 월 5백만원을 하면 대리점 주겠다고 하여 그래서 지금 하고있는데 한달에 1억원을 팔고있어요. 먼지 많이 나는데나 약품을 칠 때, 반도체공장,골프장에서 많이 씁니다.기름 많이 쏟아지는데 많이 나가고 있어요.지금 여기 저기 온 창고에 이 물건입니다.
홍: 그렇군요. 안전보호협회라는 것도 있습니까?
임: 초대회장을 내가 했지요, 10년 전인데, 몇 백명되지요. 왜 내가 했느냐 하면 난 이런 것이 생리에 맞지않아서 별로 좋아하지않는데 오랫동안 이 일을 한사람이 나 밖에 없어요. 할 수 없이 회장을 맡아서 했는데 1년도 못했어요. 회장을 하다가 보니까 경쟁업체들이 마구 치고 들어와서 내 거래처를 먹는 거야. 그래서 가격협의를 다 끝내 놓았는데 한국화약에서 전화가 왔어요. 내 견적이 100원인데 이 친구들이 90원에 한다는 거야. 회장이라고 점잔 빼고 있다가 큰 일 나겠더라구요. 그래서 그만 두었지요. 1년도 못하고 그만두었지요. 체육대회도 하고 돈도 몇 천만원 만들어 놓고 한적이 있어요.
홍: 임회장께서는 우리나라의 안전보호기구의 개척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군요.
임: 그 당시에는 안전보호구를 만들어 달라고 하면 무엇이던지 만들어 주는 거요. 그 당시 시장에 이북사람들이 많이 있었는데 저는 거래처로부터 어음을 받아 할인해서 시장에 가서 물대를 현찰로 주고 신용을 잘 지키고 했어요. 홍필흠씨 조카 홍성용이도 7년간 내 밑에 있다가 나갔어요. 요 길 건너에서 잘 하고있습니다. 나보다도 더 잘해요. 오종기도 내 밑에 하고있다가 대구로 내려갔고. 외형자체가 크지도 않고 사실 죽지 못해서 여기까지 왔는데.
지나 온 많은 시간들을..회환이 스쳐감일까 조용히 생각에 잠기는 임병환 향우
홍: 그 당시에 워킹글로브도 한 걸로 알고있는데…..
임: 한 두번하고 그만 두었어요. 하청생산을 했는데 재미가 없어서 그만 두었어요.
홍: 울릉도에서는 언제 나왔습니까?
임: 고등학교도 졸업 안하고 몰래 나왔어요. 집은 사동, 진평전의 호텔 옆에 있었구요. 국민학교는 현포국민학교를 졸업하고 태하에 좀 살다가 왔지요, 학교 다니다가 책보따리 짊어지고 부산으로 나왔어요. 여름방학 때면 유학생들이 와서 멋진 모자 쓰고 폼 재고 다니고하니까 나가야 겠다고 마음을 먹었어요. 막연하게 나갔어요. 부산 자갈치시장에 현포 김태진씨가 오징어 도매상을 하고있었어요. 최영진씨가 점원으로 있었구요. 그래서 여기저기 돌아다니다가 보니까 동원제망의 어망공장에 취직을 시켜주더라고요. 그 때 황보정이도 나오겠다고 해서 부산으로 나와서 황보정이는 염색부에, 나는 연사부로 들어가서 둘이서 기숙사에서 잠 자고, 총각이고 하니까 여공들이 예쁜 애들도 많고, 밥도 하고 그러다가 영장이 나와서 군대에 갔지요. 광주 포병학교 나와서 군대에 갔다가 제대하고 기업체에서 운영하는 학교에서 공부 좀 할까 했는데.안되겠더라고.
홍: 공부할 생각도 많이 했구만요.
임: 학교 다닐 때 우등상도 타고해서 공부에 관심이 많았어요. 8남매 중에 내가 막내고, 울릉도에는 큰 형님도 계시고 나머지는 전부 다 나왔어요.
홍: 울릉도 사람들이 육지로 나와서 역시 생활력이 강한 것 같아요.
임: 제대하고 서울에 와서 할 일도 없고하여 국민학교 학생들 서너명 불러서 2~3만원 받고 공부 가르켰지요. 그후에 미 8군 군속으로 들어갔어요. 그때 우리 부대에도 포가 전부 이북으로 향하고 있었지요. 곧 전쟁이 터진다는 이야기도 있고해서 사표내고 나와서 애들 데리고 아르바이트 하다가 허욱 전회장으로부터 소개를 받아서 한 것이지. 사실 난 계속 빡빡하게 살았어요. 그렇게 큰 여유가 있었나요.
그랜드케년에서 임병환향우와
부인 박정숙여사와 다정하게
홍: 가족관계는 어떻게 됩니까?
임: 집사람은 문경출신인데 박정숙, 큰 애가 장남 현규(73년생), 차남 현수(78년생), 장녀 수민, 제 결혼식은 그 때 홍회장이 사회를 보셨잖아요.
홍: 아, 그랬나요? 이렇게 기억이 없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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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 지금은 둘째가 이 일을 맡아서 주로 하고있고 나는 뒤에서 약간 거덜어 주고있습니다. 큰 놈은 현재 미국에 있는데 UCLA경영학과를 나왔어요. 근데 여기에서 수능 점수가 300점 넘게 나왔는데 종로학원을 2년이나 다니고. 수능점수가 잘 나와도 들어갈 때 마다 고대에도 떨어지고, 친한 친구들은 서울 연고대에 다니고 하니까 자존심 상하고 했겠지요. 유학을 보내버렸어요. 그쪽 커뮤니티 칼리지에 다니다가 죽자살자 공부를해서 성적이 좋아지고해서 여러 학교에 넣었는데 어쨌건 UCLA를 졸업하고 미국 뉴욕에서 스포츠 센터를 하고 있는데 잘 하고있는 것 같아요. 수민이는 인제대학교 간호학과를 나왔는데 미국 간호학과 시험에 붙어서 지금 가 있어요.

94년의 어느날 망중한을 즐기고 있는 임병환 향우
홍:자녀들도 모두 훌륭하게 키우시고 임회장께서는 참으로 멋진 삶을 사시고 계셔서 보기에도 좋습니다. 부디 건강 조심하시고 고향 후배들도 도와주시고 자주 뵈었으면 합니다. 장시간 감사합니다.
대담 일 시 : 2005년6월27일, 한국세이프티 회의실
임병환 : [주]한국세이프티 대표이사, 사동 44년 서울특별시 종로구 관수동 129-6
☎ 02-2273-9533, ☏ 02-2267-95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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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상표 : 재경울릉향우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