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종윤(李鍾潤)
1954년생으로 현포에서 태어나 울릉도에서 청소년기를 보내고 육지로 탈출하여 과일배달부터 시작한 그의 인생항로는 오로지 외길 경찰이었다. 1978년 말단 순경으로 출발하여 32년 만에 경찰의 꽃이라고 불리는 총경으로 승진하여 현재 양구경찰서에 재직 중인 입지전적인 인물 이종윤 서장을 메일로 인터뷰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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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도직입으로 여쭐게요. 그 어렵다는 총경 승진을 하셨는데 소감은....
나름대로 열심히 노력은 했지만 금년 1월4일에 있었던 승진후보자 명단 발표가 있기 전 두달 정도는 자다가도 자주 깰 정도로 긴장이 되었고 한마디로 어렵고 힘들었었는데... 사실 승진여부는 누구도 장담하지 못하는데 제가 승진할거라는 소문이 과도하게 나서 작년말의 향우회에 불참한 것도 심적 부담이 작용했었죠. 이제 악전고투 끝에 악산의 난코스를 정복한 산악인 같은, 조금은 홀가분한 기분입니다.
저 보다 훌륭한 자질을 갖추고 남다른 노력으로 해당 분야에서 전문경찰이 되어 직장 상사와 동료들로부터 신망이 두터웠던 훌륭하신 선배들도 많이 계셨는데 함께 하지 못한 것이 아쉽군요.
자다가도 자주 깰 정도로 긴장이 되셨다는데 예상은 하셨던가요?
건방진 얘기지만 저는 나름대로 10%의 가능성만 있으면 남들이 어렵고 힘들다 해도 언제나 도전을 했고, 잠시 넘어졌다가도 다시 일어설 수 있게 해주는 것이 있다면 “항상 새롭게 도전”하는 것이었습니다.
승진에 대한 예상보다는 나름대로 승진에 대한 계획과 기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제가 2005년도에 APEC의 기획단 요원에 참여한 이야기를 조금 하렵니다.
2004년도에 경정으로 승진하여 바다가 보이는 제2의 고향 같은 강릉경찰서에서 보안․생활안전과장을 거치며 실무경험을 쌓던 중에 부산 APEC(아세아태평양경제정상회의) 기획단요원 모집 공고가 있었어요.
2005년 초인데 경찰청 기획단 요원 모집에 선발되어 주로 동원인력․장비, 소요예산(예비비) 확보 집행 업무를 수행했었습니다.
소요 예산확보 집행 업무란 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내용인지를 설명 해주시고 계속 이어주시지요.
예비비와 본예산 확보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본예산은 확보한 당해 기관의 것인데 국제행사와 관련된 예비비는 조직의 특성상 경찰 몫으로 확보를 해두어도 경호처나 외교부 등 행사주관부처의 예산으로 총괄적으로 운영이 돼요. 따라서 주무부처에서 타 써야함으로 여러 면에서 불편합니다. 과거 월드컵 때는 국정윈에서 주무부처로 예산을 주지 않아 부처 간에 불상사가 일어난 적도 있었지요.
당시, 경대생을 포함하여 전국에서 온 개성이 강한 16명이 좁은 사무실에서 정말 죽도록 어렵게 근무했고 고향인 평리 출신 후배 이화룡이도 만났지요. 업무초기엔 사무실도 없어서 서자취급을 받으며 이리 저리 옮겨 다니고 열악한 환경에서 근무를 했습니다. 11월 행사종료 전에 제 나름의 경찰생활을 연도별로 설계를 해보았는데 2010년에 총경승진을 목표로 한 그래프를 비망록에다 그렸고, 해가 바뀔 때 마다 새 비망록으로 옮겨 붙여가며 각오를 새롭게 다짐하기도 했지요. 그러니 준비를 안했다면 거짓말이죠.
고위직 경찰 승진은 하늘에 별 따기라는 이야기가 들릴 정도로 어렵다고 들 하던데, 미래를 내다보고 성실하게 업무를 수행한 셈이군요.
사실, 경찰의 영재들이라고 할 수 있는 경찰대생들 120여명이 매년 경위로 임관하지만 그중 60%가 총경으로 승진을 못하고 경정으로 퇴직합니다. 이런 가운데 전 경찰의 96%나 되는 비 간부 출신들이 순경에서 출발하여 아무리 열심히 올라가도 퇴직연령이 가까워지는 총경 승진까지는 겨우 몇 퍼센트만 살아남게 됩니다. 따라서 제 같은 경우에는 본청 경대생들로부터 경계 대상이 된다고나 할까요? 작년 같은 경우에는 전체 경정 중에 3년간의 업무성과가 우수한 20%를 승진 후보군 “가. 나, 다”군으로 실명 공개를 했고 경찰청에서 탈락자와 서열에 대한 이의신청 재심을 했는데 항의성 답변이 엄청나서 오후면 끝 날거라 했는데 저녁 늦게 끝났습니다. 승진심사위원회에서 최종 심사를 했기 때문에 상위 20%에 들지 못하면 외부에 청탁조차 할 수 없게끔 언론에까지 공개하여 공정인사 기틀을 잡았지요.
지난해까지만 해도 승진후보로 확정되면 일률적으로 6개월간 총경 교육입교를 하였는데 저 같은 경우에는 올해 바로 서장 보직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현포가 고향이던가요? 형제들은 많았나요?
2남 4녀 중 2남으로 다섯 번째입니다. 위로 누나가 셋입니다. 김해와 서울에 두 분이 계시고 형님은 울산에, 여동생도 서울에 있습니다.
선친께서는 농․어업에 종사하며 부업으로 목수일도 하셨는데, 직업상 술을 많이 드셨고 가정교육은 어머니께서 전담 하셨지요.
부지런하셨던 어머님은 새벽녘부터 부엌에서 일을 하시며 동이 트면 내게 일어나라며 내가 일어날 때까지 계속되는 잔소리에 일어나지 않을 수 없었고, 항상 잠이 부족했지만, 그래도 위로 누나와 형이 힘든 농사일을 맡아주어서 저는 고생을 덜 한 셈입니다.
어머님은 아버님의 영향인지 몰라도 술 먹는 것을 아주 싫어하셨는데 저는 어려서부터 술에 대한 나름대로의 철학을 만들고 있었어요. “술은 좋은 음식인데 먹고 행동하는 사람들이 잘 못해서 술을 나쁘게 만든다” 라고 생각하고 술을 먹되 이성을 잃지 말자고 생각하면서 자랐습니다.
울릉도에서 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경찰에 입문하게 되었나요...
현포초등학교를 졸업하고 10리나 떨어진 천부 북중학교와 울릉종고를 졸업했는데 울릉수고 명칭이 울릉종고로 개명되고 나서 첫 졸업생이 된 셈이죠.
대학 진학공부를 했으나 예나 지금이나 머리도 별로 좋지 않고 남들보다 노력을 개을리 해서인지 대학진학을 못하고 부산과 서울로 떠돌다가 서울에서 경찰공무원 순경시험 응시를 했는데 합격을 했어요. 부평에서 12주간의 교육을 받고 순경으로 출발을 했습니다.
경찰학교 교육과정에서 울릉출신 순경 교육생들의 우상이자 대선배이신 정성학 당시 경감님을 만나 뵐 수 있었고 많은 조언도 들을 수 있었던 것이 큰 도움이 된 것 같았습니다.
가끔 교육 동기들을 만나면 정성학 선배님 자랑도 하고 청와대 계시던 얘기도 하며 으스대기도 했습니다.
경비계통에 오랫동안 근무를 하셨던데 특별한 이유라도......
신임 순경 교육 중에 101 경비단에서 근무희망자를 모집했어요. 들리는 말로는 “ 장시간 부동자세 뻗치기 근무로 관절이 상한다”는 등 고생이 극심하다는 소문이 퍼져있던 때라 서로 가지 않으려고 기피하고 있었는데, 지원자가 적어서 1차에 필요한 인원을 다 못 채웠어요. 그러니까 신장이 173㎝이상 되면 무조건 지원서(신원진술서)를 내라는 거예요. 결국 지원을 할 수 밖에 없었고 선발이 되었지요.
경비계통으로 진로를 정한 이유는 마누라와 사별하고 방황하다가 일에 묻혀 지내야 괴로움을 떨칠 수 있다고 생각하고 다들 꺼리던 경찰청 경비국 근무를 자원했죠. 경감으로 승진한 후에는 수서서에서 기동대근무 순번에 이동할 자리를 찾던 중에 경감승진에 도움을 준 101단 선배 한분이 승진한 본인자리로 오라하여 이동을 했고, APCE기획단 근무를 거치면서 경비통으로 자리매김을 하게 된 셈입니다. 그리고 G20 등 대규모 국제행사를 거치면서 자연스럽게 전문가로 평가를 받게 되었습니다.
특히 대규모 행사가 있을 시에는 예비비를 확보하고 집행하는데 부작용이 항상 많았지만 작년에 있었던 G20행사시에도 최초로 국제행사 소요예산 130 여억원을 경찰청 본예산으로 확보하는 실적을 거뒀죠. 그리고 이어서 G50(핵안보정상회의) 소요예산 190억원을 편성했고, 금년도 소요분 69억원도 확보하였습니다.
같은 업무를 반복하다 보니 이제는 남들에게 지지 않을 노하우도 생겨났고 고생으로 결속된 전우 같은 경찰 선후배도 많아졌습니다.

실제로 관절이 다칠 정도로 훈련이 심했던가 봐요
순경을 졸업하면서 바로 2주간 101단요원 교육을 받았는데 제식훈련, M16 36개 동작 풀코스 등의 특수교육을 받았습니다. 군교육대 보다 더한 기합이에요. 머리에 허물이 두 번이나 벗겨지는 혹독한 특수교육을 받았지요.
수료 후에 서울 서부경찰서에서 5개월여 군무하다가 101경비단으로 발령이 났고, 6개월간 초소에서 소위 뻗치기 근무를 했습니다. 한참 더울 때는 기온이 30도 정도로 올라가는데 아스팔트 복사열 때문에 체감온도는 50도 정도로 올라갑니다. 이럴 때 집총의 부동자세로 2시간을 초소에 서있으면 어떻게 되겠어요? 완전히 무의식이 되어 몽롱한 상태로 빠지곤 합니다.
이후에 가기 어려운 101단 단본부 경무과로 발령을 받아서 8년간 계속해서 행정업무를 담당했습니다. 처음에는 제일 말단이어서 고생이 심했는데 그런대로 잘 참고 견뎌냈습니다.
주로 어떤 업무였습니까?
제가 맡고 있던 주요 업무는 연 200명의 전출입에 따른 전입요원 신원조사라던지 신분장 제작이나 근무성적 평정, 조장요원과 행정요원의 연4회 승진임용 및 분기별 표창 뒷바라지, 연초의 경호실장 업무보고 등등 오직 일의 연속이었지요.
육체적 고생도 그렇지만 마음고생도 만만치 않았을 것 같은데 갈등 같은 것은 없었나요?
지금은 이미 작고하셨지만 당시 101단에 근무하시던 경무과장한테서 당했던 마음고생이 정말 컸댔어요. 일도 많이 시켰지만 얼마나 엄했던지... 그때가 경장으로 승진을 하고 얼마 지나지 않은 때였는데 경호실 행정과에 가끔 불려가서 일도 도와주면서 인연을 맺었던 당시 안희석 계장, 나중에 행정처장으로 퇴직을 했습니다마는 저보고 “행정처로 파견 나올 의향이 없느냐” 고 하길래 “경무과장과께서 동생 같이 보살펴 주시는데 어렵다.”고 한 적이 있었어요.
이게 우리 과장의 귀에 들어갔던 모양입니다. “아직 업무도 미숙한 놈이 길러준 자기 과장을 배신하려 한다.” 등 이런저런 말과 곁들여져서 내게 야단을 치면서 인격적인 모독으로 대할길래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서 경찰을 그만 두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어요. 의료보험증하고 신분증을 분풀이라도 하듯이 펀치로 수십 개의 구멍을 뚫어서 사직서와 함께 제출하고 일주일간이나 집에서 버틴 적이 있었어요. 당시의 중요한 보고서는 컬러풀하게 붓이나 매직으로 쓰던 시대였고 기획력이 뛰어난 과장과 문서 편집기술, 글씨를 잘 쓰는 직원들과 팀워크가 잘 이루어지면 경호처 내에서도 인정을 받던 시기라 연간 휴가를 하루도 못가는 경우가 간혹 있었어요.

조직의 상사로부터 당하는 고통이라 어려움이 컸을 텐데 용케 잘 견디셨군요.
그만두기로 작정을 하고 집에 있으면서 많은 반성을 했습니다. “그래, 다시는 야단맞지 말고 열심히 하자” 라고 스스로 다짐을 하고 다시 출근을 한 적도 있었어요. 그 뒤로 보고서 작성 이라든가 업무적으로 많은 발전을 하게 되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그 당시 과장님의 채찍질이 많은 도움을 준 셈이에요.
한번은 내가 “과장님은 어떻게 그렇게 기획을 잘 하십니까” 물었더니 “집짓는 구상을 해보라”고 하시면서 ①땅의 크기나 집의 종류, ②건축관련 행정기관, 법령․규정, ③현황, 문제점, ④예산운용-대출 등 ⑤세부 추진일정, ⑥향후계획 순으로 설명을 해 주셨는데 그 때는 크게 감명을 못 받고 뭐 그런가보다 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제게 많은 영향을 주셨고 어느 부서 누구와 견주어 봐도 지지 않을 정도로 제 업무능력이 발전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육지로 언제 나왔으며 나오게 된 동기는?
어머님께서 사내대장부가 육지로 나가 큰물에서 놀아야 한다고 권유도 했고 저도 장래 발전을 위해서는 울릉도를 떠야겠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잠시 부산을 거쳐 76년도에 서울 서대문 대조동(불광동 옆)에 사시던 둘째 누나 집으로 올라왔습니다. 누나는 당시 과일 도매상을 하고 계셨는데 이곳에 얹혀살면서 과일 배달과 수금도 하고, 저녁에는 취직공부를 위해 광화문에 있던 공무원 시험전문 학원에도 다녔습니다.
경찰에 입문한 동기라고나 할까 계기가 특별히 있었던가요?
고등학교 때까지는 조금은 내성적이었던 성격 탓에 경찰이 되리라고는 전혀 생각을 못했는데, 의외로 경찰이 된 것을 보면 전생에 지은 죄가 많았는지 이쪽으로 오게 되었으니 어쩌면 천직인인지도 모를 일이지요.
울릉도에 있을 때인데 간혹 “중요하고 굵직한 사건을 해결하는 유명한 형사”가 되고 싶다는 그런 느낌을 갖기도 했고 주위의 친구들에게 말도 했던 것 같은데 그게 어떤 암시였을까요 경찰이 된 걸 보면 말이지요.
어렸을 적 생각이었지만 단순히 월급은 적지만 평생직장으로는 역시 공무원이 최고라는 생각도 했고요. 결국 78년 11월에 순경으로 경찰에 입문하게 되었습니다.
101단에 근무하면서 당시 경호실이 군체제(경호실장 차지철)라 군(軍)계통으로 아는 사람이 있으면 좀 더 편하고 상사에게 인정도 받으면서 근무할 수 있었는데 저는 전혀 기댈 언덕이 없었으니까 오로지 혼자서 실력으로 승부하여 상사의 신임을 받을 수밖에 없었고, 아는 사람이 있어서 고생 안하고 잘나가던 선배 동료들을 보면 정말 부러웠죠. 질투도 나고 그랬어요.

경찰직에 있는 동향의 동료들과 유대관계는 ...
당시 김상준 선배가 저보다 고참으로 경찰에 근무를 하고 있었는데 101단 2중대 서무경사로 150여명의 직원을 관리하고 있었죠. 막강한 직책이라 경무과에 있었던 저에게 많은 도움이 되고 심적 의지처가 되었습니다. 이런걸 보면서 저도 후배들이 오면 잘해 주어야지 하고 여러 번 다짐하던 차에 김형식, 손태익 후배가 전입을 해왔고 나름대로는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하는데 어떻게 비춰졌을지는 잘 모르겠네요.
이제는 우리 고향 후배들이 어느 자리에 가든지 자기 역량을 충분히 발휘해서 ‘울릉도 출신’ 그러면 다들 신체 건강하고 일 잘하는 모범이라는 칭찬을 들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들이 정성학, 김상준 같은 선배들이 닦아놓은 덕이라 생각하며 항상 고맙게 생각합니다. 김형식 후배와 그 뒤를 잇고 있는 후배들이 많은데, 다방면에 뛰어난 인재들이라 제 뒤를 이어 주리라는 믿음을 가집니다.
서울에 올라온 이후에 경찰에 몸담고 있으면서 가장 힘들었던 점이 있다면...
101단에서 경위로 승진한 후인 86년 말 즈음인데, 태릉경찰서(현 중랑서) 방범과 외근계 근무를 시작했어요. 한동안 일선 근무와 멀어져 있던 터라 일선서 근무를 의욕적으로 시작했습니다. 87년 2월에 중화1동 파출소장 근무를 하면서 많은 사람들도 사귀고 정말 보람차게 일하던 때였는데, 그 때가 제 나이가 서른셋이 되던 해였어요.
그때 방범위원장이던 중화동 최정식씨가 지금도 안부를 묻고 가끔 밥도 먹곤 합니다마는 제가 방황하던 때에 재혼중매도 해준 적이 있습니다.
업무하고는 다른 이야기입니다마는 그해 10월에 집사람이 이유 없이 옆구리가 아프다고 하기에 병원을 찾아 갔는데 의사들이 병명도 모른다는 거예요. 열이 떨어지지 않고 차차 걸음을 걷지 못해서 여러 병원을 전전했는데도 차도가 없고 2주 뒤에 을지로 6가에 있던 국립의료원에서 퇴원하여 집에서 치료하던 중에 하체가 완전히 마비되었다는 전화를 받고 급히 서울대 병원으로 옮겼어요. 검사결과가 나왔는데 척추가 눌려서 마비가 되었고 수술을 해야 한다는 거예요. 당시에 빈 수술실이 없어서 서대문 적십자 병원으로 옮겼는데 조직검사를 해본 결과 골수암 말기라는 겁니다. 잊을 수 없는 12월12일입니다. 아내는 두 딸을 남겨두고 이렇게 세상을 하직했어요.
아니, 젊은 나이에 그렇게 큰 아픔이 있는 줄은 전혀 몰랐었군요.
아내를 보내고 나니까 이런저런 회한이 많았습니다. 101단에 들어 온 이후로 8년을 내리 휴일도 없이 근무를 하다가 보니까 가족들과 어울려 즐거운 시간을 함께 보낸 적도 없었고 아내를 보낸 것이 다 나 때문이라는 생각에 또 한 번 경찰직을 떠날까 하는 절망에 빠지기도 했지요. 그 이후로 경찰이 다 그렇지만 어렵다는 여러 곳으로 임지를 옮겨 다녔습니다.
경찰 공무원으로서 좌우명이랄까, 마음가짐 이라고 할까 소개를 해주신다면...................
좌우명이라면 젊었을 때는 “언제 어디서나 필요한 사람” 이었고 지금은 「去去去中知 行行行裏覺(거거거중지 행행행리각)」이라는 “가다보면 알게 되고 여러 번 실천하면 깨닫게 된다” 는 유명한 분의 말씀을 끌어다 씁니다. 조금 해보고 이게 아니라고 조급하게 그만두지 말라는 자경문(自警文)입니다.
올해 경찰 입문 몇 년 째며 사표를 내고 싶었을 때도 많이 있었을 것 같은데..........
1978년 11월 4일 경찰배명을 받았으니 32년 조금 넘게 근무 중이며 퇴직할 그날까지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제 아내가 병원을 들락거릴 때 물론 공직에 있다는 구실로 힘들어하는 집사람을 옆에서 돕지 못했다는 자책감으로 퇴직을 해버릴까 하고 수차례 고민하던 때와 엄마 없는 두 딸을 어떻게 잘 키울 것인가 하는 고심 때문에 직장에도 충실치 못하고 흔들렸던 87년과 90년대가 가장 힘들었던 시기였던 것 같습니다. 결국은 여기까지 왔습니다마는...

가장 보람 있었던 일이라면 ...
아무래도 경찰청의 경호계장으로 근무할 때인 2008년도의 촛불집회 때 인 것 같습니다. 정국이 매우 혼란스러운 시기였는데 당시엔 정말 경호여건이 너무나 어려웠었지요. 당시 경호처는 물론이고 전국의 경호부서와 협조를 해서 각종 경호행사와 대규모 국제정상회의를 성공적으로 실시할 수 있도록 임무를 수행했는데 이 때 참 보람이 있었던 것 같아요.
결국은 그 때의 성과를 인정받아서 경비국이 생긴 이래 처음으로 저를 포함해서 두 명이나 총경으로 승진할 수 있었고 얼마 남지 않은 마지막 공직을 보낼 수 있게 되어 보람이 있다면 있는 셈이지요.
요즘 경찰 고위직들이 비리에 얽히는 등 사회적으로 문제가 많은 것 같은데 소감을 듣고 싶습니다.
과거에도 그랬지만, 특히 금년에는 고위직의 공사장 함바집 운영과 관련한 비리하며 전의경 구타 가혹행위나 부주의에 의한 자체사고가 우리 경찰의 입지를 점점 더 어렵고 힘들게 합니다.
캐나다 토론토에서 작년 6월에 G20 행사를 치르면서 1조원 이상의 비용을 쓰고도 ‘블랙블락’이라는 시위대가 경찰차량을 방화하고 상점을 파괴하는 등 행사에 큰 오점을 남긴 적이 있었는데, 우리나라는 G20 준비위원회 경호안전통제단이 캐나다의 1/10도 안 되는 예산으로, 아무런 불상사도 없이 행사를 성공적으로 개최했지요. 외국에서도 극찬을 했는데 프랑스 르몽드지는 6차 프랑스 G20 행사시에는 한국을 벤치마킹해야 한다고 까지 논평을 했더군요.
경찰에서는 이에 힘을 얻어 금년부터는 인력도 증원하고 일한만큼 대우를 받을 수 있도록 직급․보수․수당 같은 체계개선을 추진 중이었는데 찬물을 끼얹은 꼴이 되어 안타깝군요.
전의경 문제는 국가적으로 돈이 들더라도 경찰관으로 시급히 대체해서 근원적으로 문제의 소지를 없애도록 해야 합니다. 그리고 지휘관들이 입대 시의 건강한 신체나 정신적인 상태를 유지하도록 잘 관리해서 제대 시에는 원상태대로 돌려보낼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전의경들에게 문제점을 물어봐도 혹시나 돌아올지 모르는 불이익 때문에 감독자에게 말을 잘 하지 않아요. 지휘관들이 자기 자식 대하는 마음으로 따뜻하게 감싸주고, 특히 부모를 통하여 부대 내의 제반 문제점을 파악할 수 있도록 여러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봅니다. 특히 어머니들에게 일일이 전화를 하니까 무척 고맙게 생각하더군요.
표창이나 포상을 받았다던가 좀 소개해주실까요...... 그리고 해외에도 자주 다녀섰는지..
표창은 여러 번 받았지요.
2000년 인터폴 총회 유공으로 대통령 표창, 2002년 모범 공무원으로 총리, 2005 APEC포럼 행사 유공으로 대통령 표창, 여타 각급 장관․청장 등으로부터 표창을 받았습니다.
APEC행사를 성공적으로 마쳤음에도 포상과 관련한 공정성과 시비를 차단하자는 의도로 단장(현 보안국장)과 제가 포상을 포기한 적도 있어요. 이때 이화룡 후배가 경위로 특진해서 마치 제가 승진한양 기뻤습니다.
주 업무가 경비였기 때문에 해외에는 자주 갈 기회가 없었고 연수차 간혹 나가곤 했습니다. 2000년에는 월드컵 1차 조추첨과 관련하여 일본에, 2003년에는 호주, 2006년에는 싱가폴과 태국․홍콩에 그리고 2010년에는 G20관련 캐나다 토론토를 방문했습니다.
체격이 장사급이신데 특별히 하시는 운동이 있으신가요? 그리고 취미 활동은 ?
내근 근무를 오래 했던 관계로 특별히 잘 하는 운동이나 특기는 없습니다.
건강이 스스로 몸을 따라왔지 건강관리를 체계적으로 못한 관계로 산자수명(山紫水明)의 고장 양구에서는 매 주말 등산과 배드민턴으로 체력을 단련해 볼까 합니다. 직장 교육상 필요해서 101단에서 태권도 3단을 취득했으나 실력은 아주 미치지 못 합니다.
취미로 가만히 앉아서 하는 숨고르기를 조금 해봤는데 전문가 수준은 아니고 가정적으로 힘들어 할 때 10여년을 “왜?” 라는 글자를 가슴에 품고 산 적이 있어요. 사람이 왜 먹고 자야하며 영혼은 일회성인지 윤회하는지 등을 말이지요.
‘나’라는 것은 영혼․육신․이름으로 구성되었는데 죽으면 모든 것이 끝인지... 이 세가지 중에 무엇이 나를 대표하는지 등등..... 밑바닥부터 파고드는 생활을 오래했고 지금의 공직생활도 그 출발점이 “왜 문서 구성이 이래? 다른 방안은?” 등에서 시작함으로 관련 자료나 규정을 찾아내어 문제를 해결하곤 합니다.

경찰직을 수행하는 사람들은 휴일도 없는 것 같아 보이던데 휴일을 주로 어떻게 보내시나요?
휴일이라고 별도로 쉬는 편은 못되고 사무실에서 주로 보내는 날이 많습니다. 경비업무라는 것이 비나 눈이 오면 재해재난 경비나 상황 유지를 해야 하고 명절이나 대통령 해외순방 시 또는 선거철에는 각종 비상근무를 하는 등 늘 긴장 상태로 근무를 하다가 보니까 쉰다는 것에 별로 익숙해있지 않습니다. 경감시절 경찰청 일반경비 반장(재해재난, 선거상황, 행사경비) 을 할 때는 아예 양말이나 속옷을 최소한 일주일치분은 사무실에 두고 생활한 적도 있어요.
가족관계는?
딸만 4명인데 큰딸은 국군 간호사관학교를 졸업해서 현재 대위로 연세대에서 교수요원으로 공부중인데 졸업을 하면 대전에 있는 국간사 교수 요원으로 근무할 예정입니다. 사위는 해군 소령으로 부산에서 세종대왕 함을 타고 있습니다. 둘째는 디자인학과를 졸업하고 강남의 디자인관련 회사에 다니고 사위는 인천 중소기업에 근무하며, 셋째는 세종대학교에 재학 중이고 막내는 고3입니다. 가정 형편이 어려워 맞벌이를 하는 관계로 양구에는 저 혼자서 생활하고 주말부부인 셈이지요.
지금도 고향에는 가족이나 친족이 있는지요? 자주 방문하는지요?
형제들이 먼저 고향을 떠나왔고 76년도에는 부모님이 마지막으로 고향을 떠나 경주에서 생활을 했어요. 몇 년 전 막내 고모댁(김재홍)도 현포를 떠나면서 이제 친척은 거의 없습니다. 경찰에 들어 온 이후 30년 만인 2006년 여름휴가에 그립던 고향 땅을 한 번 밟은 적이 있습니다. 맡은 업무가 특수해서 자주 가지를 못하게 되는군요.
현재 근무하시는 양구는 어떤 곳이며 치안을 위해 앞으로 어떤 부문을 집중적으로 추진할 계획이신지...........................
양구는 잘 아시다시피 휴전선에 가깝게 위치하고 있어서 휴전선 249㎞ 중에 27㎞를 담당하고 있는 셈이지요. 우리 경찰과 2개 사단이 함께 국가적인 위기 상황을 담당하는 업무를 맡고 있는 중요한 곳입니다.
인구는 42,000명(군 2만 포함)이고 주로 농업에 종사하며, 한반도와 부속도서를 포함할 때 국토 정 중앙인 “ 양구군 남면 도촌리”가 관내에 위치하고 있으며 소양․춘천호, 제4땅굴, 을지전망대, 1천m 이상의 고산이 5개(사명․대암․도솔․대우․백석산)나 있어 녹색의 자연이 잘 보존된 지역입니다.
치안수요는 적은 편으로 억울한 군민이 없도록 친절하고 공정한 치안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부임 직후에는 파출소 직원들과 경찰서 발전을 위한 간담회도 개최하고, 이달 초의 인사 발령시에는 파출소 직원 2명을 심사위원으로 참여시켜 공정인사를 했고요. 자율방범대 등을 활용해서 협력방범근무 체제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음주운전도 무조건 단속 보다는 홍보 후에 단속을 실시하고 있는데 군인이나 공무원은 음주운전 적발 시에는 신분상의 막대한 불이익이 있으므로 ‘소주 한병에 3천만원이고 이 돈이면 술 먹고 평생 택시를 탈 수 있다’고 홍보를 합니다. 좁은 바닥이라 농업에 종사하는 군민들 눈높이에 맞는 치안활동도 추진하고 있습니다. 특히 고속침투 상황이 발생할 시를 대비하여 주요 지점 10개소를 선정해서 대책을 강구하는 등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고향 후배들을 위해 조언 한마디 해 주시지요
중간 중간에 말씀을 드린 바 있지만 저의 경험으로 볼 때 설령 이루지 못할지라도 개인의 목표를 설정하고 그 목표를 이룰 수 있도록 “자신을 채찍질하고, 궤도에서 벗어나면 원인을 분석하고 더 노력하는 자세”가 중요하다고 봅니다. 조금 해보고 어렵다고 포기하지 말고 ‘不休不息 硏磨心身’ 해서 ‘不見其長 이나 春草滋長’(불휴불식 연마심신해서, 불견기장이나 춘초자장 : 쉬지 말고 놓지 말고 몸과 마음을 갈고 닦으면 자라남이 눈에 보이지 않으나 봄풀처럼 자라남이 있듯이) 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향우님들께서 제가 근무하는 양구를 찾아주시면 정중하고 반갑게 맞이하겠습니다.
연락처: 일반 033-481-2380 / 010-9021-8652 / 010-5329-4500(공용)
이 종 윤 소개
1954년생으로 울릉도 현포에서 출생하여 현포초등학교, 울릉북중과 울릉종고를 졸업하고 2006년도에 강릉영동대를 졸업하였음.
1978년 경찰에 투신하여 87년 중화 파출소장, 88년 기동대 소대장, 90년 불암 파출소장을 거치면서 3D부문인 경찰청 경비과로 자원하여 자리를 옮겼고, 기획, 서무, 국회 담당 등 업무를 맡아오면서 1998년 경감으로 승진하여 인천청 연수서와 서울 수서서 경비계장을 거쳐 다시 경찰청 경비과에서 행사경비, 기획, 국회업무를 하였음.
2004년 경정으로 승진, 강릉서에서 근무하고 2005년 APEC 기획단 근무 - 상황실장 - 경호계장(G20, G50 사전준비팀장)으로 근무 중 2011년 총경으로 승진하여 1월11일부터 양구서장으로 재직 중에 있음.
취미는 등산이며 배드민턴, 인터넷의 까페 운영도 직접 제작함.
@2011-02-16 대담자: 홍 상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