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성 홍 ( 李 盛 弘 )
울릉도 도동에서 태어나 고분자 공학이 무슨 학문인지도 모르는 시대에 이미 앞을 내다보고 도전을 했고, 찢어지게 가난하여 어려웠던 어린 시절을 굳은 의지 하나로 슬기롭게 극복하고 경북대학교를 거쳐 환경생태학으로 이학박사를 받은 후 현재까지 김천대학교에서 28년간 교수로 재직 중인 이성홍(도동, 49) 향우를 찾아봅니다.
지금도 육지로 향한 그리움과 향학열에 불타고 있을 울릉도의 청소년들에게도 희망의 불꽃이 될 것입니다.

이성홍 교수
어렸을 적부터 공부하기를 좋아 했던가 봐요? 대학교수가 되고 이토록 오랫동안 교편을 잡고 계시니까 말입니다.
사실 어렸을 땐 공부를 열심히 하지 못했습니다. 당시 대부분의 학생들과 마찬가지로 책도 별로 없었고 공부 할 여건이 안됐으니까요. 학교 갔다 오면 나무 하러 다니고 돼지 키우기에 바빴으니까요. 책보는 것은 좋아했지요. 호롱불 켜 놓고 책보다 잠이 들어 댓자리를 태워 불 낼 뻔 한 적도 있었습니다. 다행히 30대에 대학교수를 시작해서 이제 정년이 얼마 남지 않았군요.
대학교에서는 전공이 무엇이었으며 학위취득은?
대학에서 전공은 고분자공학이었습니다. 60년대 말 울산공업단지가 조성되면서 국내 처음으로 경북대학교에 첨단 학과로 생겨 많은 우수 학생들이 몰려 당시 경쟁률과 커터라인이 가장 높았습니다. 대학원은 서울대학교 보건대학원에서 환경과학을 전공했습니다. 박사학위는 대구가톨릭대학교에서 환경생태학전공으로 이학박사 학위를 받았고요.
당시에 고분자 공학을 전공하겠다고 도전하였으니 혜안이 놀랍군요. 누군가가 추천을 해주었던가요?
원래 의과대학을 갈려고 했습니다만 가정 형편상 빨리 취직을 해야겠다는 생각에 당시 첨단 학과로서 처음 생긴 고분자공학과를 지원했지요.
고분자공학과에서는 우리가 알고 있는 유기재료 즉 플라스틱, 섬유, 고무, 접착제, 페인트 등과 같은 고분자 재료의 합성(화학), 재료의 물성(물리), 그리고 제품으로의 가공 방법 등에 관한 제반 지식을 배우게 됩니다.
산업사회가 고도화 되어감에 따라 고분자 재료는 기존의 석유화학산업은 물론 전기, 전자, 생물학, 의학은 물론 환경 분야는 물론 최근 들어 정보, 통신기술(IT), 생명공학기술(BT), 나노 테크놀로지(NT) 등의 분야까지 핵심적 역할을 하는 첨단 학문분야이지요.
도동에서 태어났지요? 형제들이 많았던 것 같아요?
예 도동에서 태어났습니다. 3형제 중 제가 맏이이고 아래로 두 동생이 있습니다. 아버지는 내가 열 살 때 일찍 돌아가셨지요. 어릴 땐 할머니와 어머니 그리고 3 형제가 힘들게 살았던 지난날입니다.
형제분들이 모두 공부를 잘해서 천재집안이라고들 했다는데, 할머님과 어머님께서 공부시키신다고 무척 힘이 들었을 것 같네요. 특히 여건이 어려운 울릉도에서 말입니다.
과찬입니다.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다들 힘들게 공부했던 어린 시절입니다. 그 당시는 울릉도의 모든 사람들이 다 어려웠지만 우리 집은 그중에서도 더 어려웠던 것 같습니다.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고 할머니와 어머니는 방물장수로, 떡장수로, 나중엔 바느질을 하시며 우리 형제들을 키우셨고 그 희생으로 오늘의 우리가 있게 된 것 같습니다.
초등학교와 중학교는 울릉도에서 다녔고 고등학교와 대학교는 대구에서 다니며 고등학교 때부터 가정교사를 하였지요. 자취할 때는 라면이 주식이고 때로는 끼니를 굶어 가며 공부를 했지요.
육지를 언제 떠나 왔으며 나오게 된 동기라고나 할까 계기는?
1965년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를 진학 할 형편이 되지 않던 나에게 당시 영어 선생님이시던 홍대춘 선생님이 대구의 성광고등학교를 소개해 주어 3년 장학생으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초등, 중. 고등학교 대학교 등 학창시절의 이야기부터 보따리를 풀어보실까요, 궁금하군요.
초등학교시절엔 6학년 때 5.16이 일어나 일 년 동안 담임선생님이 네번이나 바뀌기도 했고요. 어느 날 혼자서 혁명공약을 외우고 학교 갔더니 마침 선생님이 수업시간에 누구 혁명공약 외울 사람? 하길래 손을 들고 외우자 선생님이 놀라며 칭찬해주시던 추억도 있습니다. 또 초등학교 축구대회에서 골키퍼로 나가 우승했던 기억, 그리고 중학교 때 여러 학교 대표들과 함께 박정희 재건최고회의 의장 초청으로 대구와 서울, 그리고 청와대를 방문했던 일이 가장 기억에 남습니다.
그 당시 서울 어느 여관에 머물 때는 동네 사람들이 울릉도 사람 구경하러 왔다며 구경 온 적도 있었고요.
고등학교 대학교 때는 자취하거나 거의 가정교사를 하며 학교를 다녔지요. 대학 4학년 때 매일신문에 가정교사 경험담을 투고해 기사화 됐을 때 어느 고등학교 여학생이 따라다녀 무척 애먹었던 적도 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즐거운 추억거리입니다. 대학 1학년 겨울 방학 때 서울 하일동 가나안농군학교에 가서 보름간 김용기 장로님으로 부터 받은 교육은 지금까지 내생활의 기본 철학이 된 것 같습니다. ‘심은 대로 거둔다’는 말과 ‘일하기 싫으면 먹지도 말라’ 는 말씀은 지금도 귀에 들리는 것 같습니다.
학창시절의 특별한 꿈이랄까 이상이 있었다면... 학교에 다닐 때부터 교수를 하겠다고 작정을 하고 준비를 했던가요?
중학교 2학년 때 담임이시던 홍문자 선생님이 장래 꿈이 뭐냐고 물으실 때 나는 ‘대학교수입니다’ 하고 대답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사실 그때는 대학도, 교수도 잘 모르고 대답했던 것인데 오늘날 그 꿈은 이루어 졌습니다. 대학 때는 빨리 취업해서 돈을 벌려고 공대를 갔었습니다만......
말이 씨가 된다고 내가 꿈을 얘기 했을 때 그것이 20년 뒤에 이루어 졌지요. 공군 장교로 전역 후 영진 약품 연구소에 근무하다 김천대학으로 갈 기회가 있어 바로 결단을 내렸답니다.
언제부터 대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는지요? 지금까지 길러낸 제자는 몇 명이나 되며 학생 들을 가르치면서 겪었던 이야기를 좀 해주시죠.
대학으로 온 것은 1984년 3월에 김천대학 환경관리과 교수로 부임했지요. 지금까지 28년 동안 약 2000 여명 가까운 제자를 가르친 것 같고요, 그 중에 는 기억에 남는 제자들도 많이 있습니다.
얼마 전 졸업한지 20년이 되는 한 제자가 전화를 걸어 왔어요. 졸업 후 취업까지 시켜줬는데 몇 년 후 학교서 만났더니 다리를 절며 목발을 하고 있었습니다. 사연인즉 2년 후 다른 유통회사로 옮겨가 트럭에 물건을 싣다가 떨어뜨리는 바람에 왼쪽 발목을 심하게 다쳐 결국은 발목을 절단 했다고 했습니다. 그러고는 한동안 잊고 있었는데 최근에 전화가 와서 그 후에 퇴직하고 다시 공무원 공부를 해서 교정직 공무원으로 근무하며 결혼도 하고 아들 둘이 있다며 한번 찾아오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참 감사했지요. 형편이 어려운 학생들 잘 지도하여 졸업 후 취업시키고 그리고 결혼 주례까지 하고나면 많은 보람을 느끼지요.

학계에 선배들이 많지 않는 울릉도 출신이라서 외부의 큰 도움도 없이 오로지 혼자서 학교에서 인정을 받기에는 어려움이 많았을 텐데 괴로웠던 옛날을 잠깐 회상 해보실까요?
사실 우리나라 풍토에서 혼자서 헤쳐 나간다는 것이 쉽지는 않았습니다. 그 러나 외길로 걸어온 이 길은 힘든 일도 있었지만 보람도 많았습니다.
가장 힘들었던 것은 학교 초창기 때 학생 모집 때문에 전국을 다니며 홍보도 하고 외지학생을 데려다 재워주고 등록시켰던 일도 있지요.
요즘은 학생 수가 부족하다보니 비인기학과는 정원 채우기도 어렵고 또 구조조정으로 학과가 폐과가 될 때 참으로 안타깝기도 하고 어렵지요. 그러나
학생들과 같이 괴로워하고 즐거워하다보니 벌써 정년이 얼마 남지 않았군요.
강의 말고 다른 교직활동도 하시나요?
김천대학교에서 28년간 근무하는 동안 학과장 , 학생처장, 도서관장등을 역임하였고 요즘은 채플선교 센터장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지금 맡고 계시는 과목은? 최근엔 학문의 장르를 별도로 구분하지 않고 전혀 다른 학과와 공동작업도 한다던데............
요즘 학생 수가 줄어들면서 대학마다 비상이지요. 또 학생들은 어려운 이공계 학과는 기피하는 경향이 많고요. 우리 대학도 환경관리학과가 90 년대에는 매우 인기 좋은 학과였지만 최근에는 학생 수의 감소로 얼마 전 없어졌습니다. 요즘은 교양학과에서 ‘환경과 인간, ’일반화학, ‘공중보건학’등 교양과목 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학회 활동도 하고 계시나요? 토론도 자주 하시구요.
지금 참여하고 있는 학회는 대한환경공학회, 한국폐기물자원순환학회, 한국환경보건학회 등에 관여하고 있습니다.
논문 수를 이야기하기는 좀 그렇습니다 만은 지금까지 발표하신 논문 수는 얼마나 되며 가장 애착이 가는 논문은 무엇입니까?
그 동안 쓴 논문 수는 약 20 여편 됩니다.
가장 애착이 가는 논문은 역시 석사 및 박사 논문이지요. 석사 논문은 한국 인삼의 생육기간별 아미노산 성분의 함유량을 분석한 것입니다. 인삼은 주성분이 사포닌이지만 그 외 여러 성분 중 아미노산 함량을 분석한 결과 중요한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아미노산 18개 성분 중 아르기닌의 성분이 다른 성분보다 최소 수십 배나 많이 함유 되어 있다는 겁니다. 필수아미노산인 이 성분은 일본 아지노모토 연구소 연구에 의하면 성기능을 좋게 하는 스태미나 성분이지요. 물론 다른 좋은 효능도 많습니다만.
그리고 박사학위 논문은 꽃게 껍질의 중금속 흡착특성에 관한 것입니다. 게 껍질 속에 들어 있는 키틴성분과 탄산칼슘이 수중에 오염된 중금속 흡착능이 뛰어나다는 사실을 실험으로 밝혀낸 것입니다.
논문을 쓰실 때 에피소드가 있으면.........
박사학위 논문을 쓸 때 게 껍질을 구하러 대구시내 해물탕 집을 자주 찾아가면 게 껍질은 도대체 무엇하러 모우냐고 묻기도 하지만 아내가 가면 껍질만 가져가지 말고 남편이나 좀 데리고 와서 잘 먹이라고 그런다고 그러더군요. 내가 워낙 여윈 체질이라 보기가 딱했던 모양입니다.
또 대전 카이스트에서 실험을 할 때 방학동안 대구에서 거의 매일 출퇴근 하거나 아예 밤을 새우며 실험을 했던 일이 새삼스럽군요. 그때 실험을 할 수 있게 도움을 준 정안식교수님도 정말 고마우신 분으로 잊을 수가 없습니다.
오랫동안 교편생활을 해오시면서 좌우명이랄까 마음가짐 이라고 할까 어떤 자세로 살아오셨는지......... .
내가 좋아하는 글귀 중 한 가지는 “The Use of Life" 라는 책 중에 있는 말입니다
“장미에 가시가 있다고 불평하지 말고 가시나무에 장미가 핀 것을 감사하 라”
그리고 앞에서도 얘기한 “심은 대로 거둔다” 는 말을 늘 기억하며 살지요.
오랜 교편생활을 하셨는데 특별히 생각나는 일을 회상해 주신다면...
김천대학교에 근무한지가 오래되다 보니 내 젊음을 이곳에서 다 바 친 것 같습니다.
처음 김천이라는 곳으로 와서 낯선 동네에 적응하기도 쉽지 않았고 또 외지인들에 대한 배타심이 강한 곳이라 힘든 일도 많았답니다. 그러나 교회에서 많은 사랑을 주었고 힘이 되어 주었습니다. 아내는 서울서만 살았기 때문에 김천 사투리를 알아듣지 못해 시장에 가면 상인들이 고함을 지르며 화를 낸다고 육개월 동안 시장엘 가지 못해 애를 먹기도 했어요.
학교생활은 늘 젊은 학생들과 어울려 생활하는 곳이니 나 역시 그들과 눈높이를 맞춰 살다보니 마음은 아직 20대 같은데 몸은 벌써 60을 넘었답니다.
표창장이나 훈장 같은 것을 받은 것이 있으면 소개 좀 해주실까요?
김천지역의 환경활동을 처음 시작하면서 오해도 많이 받았고 힘이 들었지만 이런 활동을 통해 김천시민들이 환경에 대해 많은 관심과 이해를 하게 된 일이 참 보람됩니다. 또 이런 일을 통해 김천시장 감사장, 경북환경상(도지사상), 대구 환경청장 표창, 그리고 소년교도소 교정위원을 하면서 받은 법무부장관 표창도 기억에 남습니다. 그때 상담한 학생들이 부산 동의대사건 주동학생들이었습니다.
퇴직을 한 이후라도 꼭 이것은 해놓아야겠다 하는 것이 있다면........
아직 구체적인 계획을 세운 것은 없습니다만 여건이 허락한다면 고향의 자료를 모으고 정리해서 구체화하는 작업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예를 들면 울릉도 호박엿의 유래처럼 잘못 전해지고 있는 것도 바로 잡도록 하고 또 각 전문가들이 연구한 울릉도에 관한 논문이나 자료를 한데 모아 집대성하는 일을 누군가는 해야지요. 혼자서 하기는 힘들겠지만..

공부만 하다가 보면 체력관리도 중요한데 특별히 하시는 운동이 있으신가요? 그리고 취미 활동은 ?
특별히 하는 운동은 없습니다. 나이도 들고 하니 이제부터 탁구나 요가를 좀 해볼까 생각중입니다. 김천서 살 때는 테니스를 좀 했습니다.
취미로는 여행을 좋아해 방학 때 해외를 자주 갔다 오지요. 1991년부터 시작한 여행은 거의 해마다 외국으로 다녀왔습니다. 3년 전에는 터키, 2년 전에는 남미 페루의 아마존과 마추피추, 일본 홋카이도, 그리고 작년엔 아랍에미레이트 두바이와 아부다비 그리고 태국 푸켓엘 다녀 왔습니다. 지금까지 약 30개국을 갔다 왔는데 앞으로 아프리카, 인도, 남미 쪽으로 계획하고 금년 여름엔 동유럽으로 나갈 계획입니다.
형편만 된다면 5대양 6대주의 반은 다녀와야 할 것 같습니다.
특히 마추피추에서 2500미터 산 정상에 만들어 놓은 석기 문명은 잉카문명의 불가사이한 모습에 감탄할 뿐이었습니다. 특히 마추피추 뒤에 있는 가파 른 산꼭대기에 만들어 놓은 석축 건축물 와이피추도 현대의 상식으로 는 이해하기 힘든 문명의 흔적들이었지요. 두바이 역시 사막한복판에 세워진 최첨단 도시의 모습 그리고 세계가 모두 불가능하다고 한 828미터 높이의 버즈 칼리파 빌딩은 우리나라 삼성건설이 완공했다니 대단한 한국의 자랑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가족관계는?
가족으로는 아내와 아들 둘이 있습니다. 큰아들은 대학병원 의사로 근무 하고 있고 둘째는 서강대를 졸업하고 의학전문대학원에 다니고 있습니다.
고향에는 가족이나 친족이 있는지요? 자주 방문하는지요?
고향에는 친척이 여러분 계십니다. 석포에 고모님, 저동에 외사촌 형님, 그리고 남양에도 여러분 계시지요. 고향을 자주 가고 싶은 마음은 참 많습니다만 쉽게 잘 안되는군요. 이제 교통편이 다양해진다니 여유롭게 한번 가볼 계획입니다. 정말 울릉도는 자랑스러운 고향이지요. 가능하면 이제는 더 이상 개발을 하지 말고 자연 그대로의 울릉도로 잘 보존 할 수 있도록 다 같이 노력해야 할 때 인 것 같습니다.
기타 사회공헌 활동이랄까 지역의 봉사활동 같은 지원 사업을 하시는 것이 있으시면 소개해주실까요? 재구 향우회장도 하셨지요? 그것도 좀 이야기해주시고요.....
김천에 처음 와서 환경운동을 시작했지요. 김천의 젖줄인 감천 상수원 유역에 공단 건설을 시작하는걸 보고 매일신문 칼럼을 통해서, YMCA 시민 강좌와 토론회 등을 통해서 반대 운동을 펼쳤습니다. 처음엔 사람들이 나를 비난하기도 했지만 결국 공단조성이 무산되었지요. 그리고 고속철도 도심통과 반대운동, 봉계마을 골프장 반대운동 등 지역 환경 문제에 참여를 많이 했습니다. 특히 김천시장과 울릉군수를 역임하신 고정환 박사와 함께 김천 자연 보호 및 감천 강살리기 운동을 오래 했지요. 그러다 초대 김천 아젠다 21 협회회장을 맡아 일했고 요즘은 환경부 환경홍보강사로 초중고교, 군부대 관공서 등 많은 곳에서 환경 특강을 하고 있습니다.
재구울릉향우회장은 우연찮게 맡게 되었습니다. 사실 지금은 고인이 된 유해준 친구가 향우회 일을 오랫동안 많이 했고 회장을 맡아야 할 차 례였는데 건강과 개인 사정으로 제가 대신 맡게 되었지요. 처음엔 의욕적으로 활성화를 위해 열심히 일해 보려고 애를 많이 썼습니다만 모든 게 제 뜻대로만 되질 않는군요.
어릴 때를 생각하시면서 한창 자라나는 고향 후배들을 위해 한 말씀 해 주신다면...
꿈을 가지라고 당부하고 싶습니다. 꿈이 있는 사람은 그 꿈을 이루기 위해 자기 삶을 살아가는데 최선을 다 할 것입니다. 때로는 목표치의 100%를 달성하지 못하더라도 그 정상 가까이 갈 수는 있습니다. 최선을 다해 자신의 비전을 이루려고 노력하는 사람에게는 그 꿈이 이루어지게 돼 있습니다. 심은 대로 거두는 것이 인생 법칙이니까요.
고향의 후배들이 넓고 크게 보고 미래를 준비하는 지혜로운 사람들이 되길 바랍니다.
소 개
이성홍 교수는 1949생으로 울릉도 도동에서 태어나 울릉초등학교와 울릉중학교를 다녔으며, 대구로 나와 성광고등학교와 경북대학교를 졸업했습니다. 그리고 서울대학교와 대구 가톨릭대학교에서 석사와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공군장교로 제대 후 영진약품에서 근무하다 김천대학교 교수로 지금까지 28년간 재직하고 있습니다.
가족으로는 아내 박명숙과 한솔(의사), 한범(의전원 재학) 두 아들이 있으며
형제로는 이 성광( 전 농협울릉군 지부장), 이 성만( 주성대학 교수) 두 동생이 있습니다.
학 력
1. 1962년 : 울릉초등학교 졸업
2. 1965년 : 울릉중학교 졸업
3. 1968년 : 성광고등학교 졸업
4. 1972년 : 경북대학교 공과대 고분자 공학과 졸업
5. 1983년 : 서울대학교 보건대학원(환경전공) 졸업
6. 1994년 : 대구가톨릭대학교 이학박사 학위 취득
경 력
1972년 ~ 1976년 : 공군 장교 근무
1976년 ~ 1984년 : 영진 약품공업주식회사 중앙연구소 근무
1984년 ~ 현 재 : 김천대학교 교수
수 상
1. 법무부 장관 표창
2. 경상북도 환경상
3. 대구지방환경청장 표창

강영호
내가 아는 이성홍"
‘이성홍’ 하면 맨 먼저 떠오르는 것이 내가 가장 존경하는 중학교 동기동창입니다.
이박사는 도동 초등학교 졸업생 이고 나는 저동초등학교에 다녀서 어린 시절은 잘 알 수 없으나
울릉중학교에 아주 우수한 성적으로 입학하여 3년간 장학생으로 다니면서 늘 조용하고 성실한 학생, 그리고 몸이 가냘픈 학생이었습니다. 그 시절에는 모두가 어려운 환경 속에서 살아갈 때였지만 이성홍은 할머니와 어머니를 모시고 아래로 남동생 둘과 울릉중학교 정문 앞에서 살았습니다.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이 울릉도에 다녀간 후 제2회 학생 초청으로 동기 몇 명과 같이 서울을 다녀온 일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성홍은 대구에서 고등학교, 대학교를 다니면서 가정교사를 하고 두 동생들과 생활하면서도 늘 웃는 얼굴로 친구들을 대하고 한번도 화를 내는 일이 없었지요.
고교시절이 얼마나 힘들었는지는 신상봉 동기가 언젠가 한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자취할 때인데 같이 밥을 먹고 있는데 이성홍이 코피를 흘려 우리 모두는 깜짝 놀랐으나 본인은 조용히 일어나서 밖에 나가 씻고 와서는 아무런 일도 없었던 것처럼 밥을 먹었다는 일도 있었지요. 그렇게 열심히 바쁘게 살면서 대학을 졸업하고 학사장교로 공군복무를 하고 서울에서 직장생활을 하며 대학원의 석사, 김천에서 교수로 있으면서 박사학위를 취득하는 열정과 끈기는 우리 동기 중에 으뜸이고 사회에 귀감이 될 인물이지요.
강영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