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디자인 하우스 대표 이영혜
아무 호기심도 끌지 못하고,무표정하게 나열돼 있는 그곳들
진정성도 특별함도 없이 토목공사 수준인 대한민국…
우화 중에 '토끼와 거북이' 이야기가 있습니다. 토끼가 거북이에게 진 까닭은 느린 거북의 걸음을 업신여겨서 낮잠을 잔 것이 원인이었습니다. 우리는 토끼를 비웃습니다. 여기에서 토끼의 가장 큰 문제점은 경쟁상대, 즉 따라가야 하는 목표를 거북이한테만 두었다는 사실입니다. 만약 이 기회에 토끼 스스로가 자신에게 걸맞은 목표를 가졌다면 낮잠 따위는 생각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더 빠른 짐승한테 잡힐 뻔했던 위기를 기억하고, 그리하여 자신이 얼마나 빨리 뛸 수 있는가를 측정하는 데 관심을 두었더라면 게임에서의 승리뿐 아니라 토끼의 가없는 도전을 칭송하였으리라는 누군가의 이야기는 기억해 둘 만합니다.
우리나라 전국이 자기 지역의 특색과 고유한 역사, 그 지역만의 산업, 지리적 자연환경에 맞는 개발로 자립도를 높이고 잘 사는 고장으로 만들고자 하는 지방자치제의 의지와 정부의 관심 속에 개발이 확대되고 있습니다. 어쩌면 우리나라의 미래는 지방의 개발만이 남아 있는 과제요, 보고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곳에 가고 싶은 이유'를 잘 만들어 낸다면 많은 사람들의 여행은 물론 지역에 대한 이해, 특산물 판매 등을 기대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지역 개발을 검토할 기획서에는 문화축제, 테마파크, 체험공간, 공원, 홍보관, 영상관, 클러스터, 상가시설, 박물관, 교육프로그램, 숙박, 유희시설, 푸드 코트, 주차장, 풍물, 이벤트 등과 같은 제목들이 나열될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회의와 노력으로 완성되었으리라 믿는 지역의 결과물은 왜 모두 비슷하게 끝이 나는지 복기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위의 제목들을 거의 빠뜨리지 않고 기획한 뒤, 모든 예산을 이 제목들에 형평에 맞게 배분한 나머지 모두 평평하게 만든 것이 아닐까를 쉽게 예상해 보는 것입니다. 안 가봐도 전혀 호기심이 일지 않거나, 가보지 않았다는 데 조바심이 일지 않는 또 하나의 그렇고 그런 풍경을 가지고는 지역과 정부가 기대하는 수준을 만들 수는 없습니다. 건물은 큰데 찾아오는 사람이 너무 없어서 그것을 유지하는 비용이 더 문제라는 푸념, 그곳에서 하는 공연이 있다가 없어졌다거나, 지역 특산물의 나열식 전시, 사람들이 많이 올 때를 대비한 표정 하나 없는 커다란 시멘트 바닥의 주차장(대개는 가장 먼저 보게 되는 이 주차장에서 기대감이 사라지고 맙니다)….
아아, 이런 특별함이나 진정성이나 남다른 감각이 없이 아주 비슷비슷한 공간과 환경들. 우리는 어느 사이 기획서에 쓰여 있는 위의 제목들에 빈칸 채우기를 한 것은 아닐까요? 필경 다른 지역의 것을 구해서 그 기획서를 보고 따라 하지 않았다면 어찌 이렇게 비슷한 걸까요. 전국에 70점짜리가 무수한들 100점짜리 하나만 못하다는 사실을 우리는 압니다. 누구나 고심을 하는 대목일 것인즉, 우리는 무엇을 놓치고 있는 것일까요?
"모든 자연물은 그들 각각의 종을 구분할 수 있는 분명한 외양, 즉 형태를 갖는다. 그것들의 내적인 생명력과 외적인 형태는 완전하게 하나로 결합되어 있다. 이것이 자연의 법칙이다." 따라서 생산과 소비의 주체, 사람들이 이제 달라졌다는 데 관심을 더 두어야 합니다.
TV 드라마 히트하기가 영화보다 어쩌면 더 어렵다고 합니다. 영화는 감동할 준비를 하고 영화관을 찾지만, TV는 안방에서 여러 잡담과 눈에 보이는 많은 소실점 사이에서 시선을 끌어야 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지금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 소실점이 많은 세상을 살고 있습니다. 웬만해서는 감동시키기 어려운 시대입니다. 어떤 행동이 일어나게 할 것인가, 심지어 어떤 기분이 들게 할까, 마음의 템포까지도 고려해야 합니다. 이제 위성 수신장치 출현 이후 높고 큰 건물의 '랜드 마크'는 의미가 퇴색되었고, 어떤 매력을 느끼게 할까를 고심하는 '마인드 마크'가 더욱 중요한 시대라는 이어령 선생의 지적에 너무나 공감합니다. 마음에 이정표처럼 찍혀 있게 만드는 일, 시간과 돈이 교환되는 곳. 지불한 것보다 더 돌려받을 수 있다는 환상과 기대감 속에 교환은 존재합니다. 그 환상이 유지되어야만 적어도 행복한 공존이 가능할 것입니다.
과문한 탓이지만 우리 사회는 이런 아이디어, 내용, 기획, 디자인, 콘텐츠라 불릴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기획하려는 노력을 별로 알지 못합니다. 또한 이런 생각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행정부나 기업의 지출 항목에 이런 비용을 쓸 수 있는 칸이 아예 만들어져 있지 않습니다. 이래서는 창조경영이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이런 지출을 무시하는 한 다른 고장과 차별화가 될 수 없으며, 결국 우리나라는 토목공사 수준의 나라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토끼처럼 거북이를 목표로 삼지 말고 고장 특유의 이야기를 남다르게 개발할 수 있을 때 힘껏 뛸 수 있습니다.
2009-11-5 조선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