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nowland.jpg

고향(
故鄕)

 

대한민국에서 눈이 가장 많이 내리는 설국(雪國) 울릉도에 올 겨울 들어 처음으로 1 20cm가량의 눈이 쌓여 성인봉(해발 987m) 등 높은 산들이 새하얀 옷으로 갈아입었다. 울릉도는 이날 성인봉, 말잔 등(해발 968m), 미륵산(해발 901m) 등 해발 900m가 넘는 높은 산에는 20~30cm의 눈이 쌓였으며 나리분지 등 산간 마을에도 5~10cm의 눈이 가득 쌓여 겨울을 실감나게 했다(경북매일/ 2011-12-2)

 

 

성인봉 먼 자락에 초설(初雪)이 내렸다는 소식에 공연히 마음이 짠해진다.

텔레비전에서 슬쩍 흘러나오는 CF의 배경 노래에도 간혹 전율을 느끼며 소스라쳐 놀라곤 하는 처지이고 보니 태생이 외로운 섬 출신인지라 남들보다 감수성이 민감한 것 같기도 하고 젊었을 적의 그 감동이 내게 아직도 남아있는 것 같기도 하여 때로는 나이에 걸맞지 않는 것 같아 스스로 민망스러울 때도 있다.

 

정말이지 낙엽 한 잎과 감미로운 멜로디 한 소절 그리고 하얀 눈에 이리도 민감해 있는 내가 때론 의아스러울 때가 있다. 내 아내는 이런 나를 보고 신기해 한다. 아직도 당신은 이 십대의 감수성 많은 청년이라고 말이다. 가수 이문세가 어느 광고에서 들릴 듯 말 듯 애잔하게 잔잔히 깔아주는 멜로디, 신민아와 원빈의 맥심커피 T.O.P 광고에서 저 깊은 내 심장 속에서 무언가 짠한 연민의 정이 솟아남을 보고 난 소스라쳐 놀라고 있는 것이다. 칠십 나이를 목전에 둔 처지임에도 난 여전히 문학청년 같은 애틋한 감성이 살아있는 것이다.

 

지나쳐 가는 일상의 조그만 것들로 인해 이렇게 마음의 파장이 일어나고 계절의 변화에 민감하게 대응하는 것은 초등학교를 끝으로 일찍 고향을 떠나 육지로 나온 탓일지 모르겠다. 더욱이 사방이 바다로 둘러 쌓인 동해의 외로운 섬이 그 근원이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해본다.

 

아침 저녁으로 약간 쌀쌀하긴 하였으나 아직, 겨울의 내음을 미쳐 느끼지도 못하였는데 올해 들어 울릉도에 첫 눈이 내렸다는 소식이 텔레비전에서 나온다. 방송이나 신문에 ‘울’ 자만 보여도 혹여 ‘울릉도’ 소식이 아닌지, 좋은 소식인지 나쁜 소식인지 가슴이 벌렁대는 걸 보면 고향에 대한 연민이 꽤나 깊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토록 그리운 고향임에도 자주 찾아보지 못하는 것은 늘 ‘고향 섬’이 안개 자욱한‘환상의 섬’으로 저만치 멀리 떨어져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환갑이 지나고 나서야 일년에 한번 정도 찾게 되었지만 내 고향은 아직도 가까이 있는 듯 하면서도 먼, 그리고 어딘가 어색한 이방의 외딴 섬 같은 느낌은 나만의 공연한 상념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고향이 고향답게 거기에 존재해야 하고, 찾아가고 싶은 나만의 이유는 무엇일까?

 

산천과 풍물의 정겨움이 옛 추억 그대로 남아있기 때문이 아닐까?

그 옛날 도동항 가운데에 정박해 있던 ‘금파호’와 ‘청룡호’는 없지만 지금은 ‘한겨레호’가 터미널에 바로 정박해 있어 육지로 떠나가는 뱃고동 소리의 그 정겨움은 사뭇 달라졌지만 그래도 그 정취는 아직도 남아있는 듯 하다.

 ‘하시게’에 몸을 싣고 어둠 속을 헤쳐 본선에 가까워지면 가슴 뭉클한 묘한 흥분이 스피커에 흘러나오는 ‘울릉도 트위스트’와 ‘동백아가씨’의 노래 가락에 어우러져 남아있는 사람과 떠나는 사람의 ‘회자정리(會者定離)’를 실감케 하는 모습이 떠오르는 것은 분명 옛 것의 정취일 터이다.

 

도동항의 오른쪽 끝 갯바위에서 “연락선 온다”고 고함을 치면서 손을 흔들어 신호를 보내곤 했던 그 곳도 아직은 그 흔적이 남아있어 좋다. 바위에 올라가 두 손으로 코를 잡고 다이빙을 하던 그 때의 그 바위도 세월의 무상함을 애써 외면하면서 그대로 자리매김을 하고 있어서 반갑고 오랜만에 찾은 나를 반기는 듯하여 더욱 반갑다.

 

군수관사와 이영관 어르신의 옛 집, 그리고 읍 사무소 뒤에 남아있는 빨간 양철지붕에 나의 동공이 커짐은 내가 이곳 섬에서 태어났고 유년시절을 보냈음을 확인시켜주는 증거품은 아닐는지?

 

친구들과 어르신들이 현존하기 때문은 아닐까?

청 장년기에는 도회에서 직장생활을 하고 결혼하느라 고향 친구들과도 자주 접촉을 못하였던 우리들 세대다. 어느 정도 나이가 들어 철이 들 무렵이 되어서야 고향의 친구들도 보고 싶고 그들이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궁금하기도 하여 어렸을 적보다 오히려 더 자주 안부를 묻곤 했다.

우리 친구들만 해도 그렇다. 이름만 겨우 알뿐 학교생활 내내 말 한마디도 건넌 적이 없었던 여자친구들이 어느새 성인이 되어 짝을 찾고 아이를 가진 이후에야 스스럼없이 모여서 밤을 세워 술도 마시고 노래도 부르는 뻔순이 뻔돌이가 되었으니 말이다.

대부분 육지로 떠났지만 그래도 몇몇은 우리가 태어나고 유년시절을 보냈던 그 곳에 남아있어 좋지 않는가.  술잔을 기울며 옛 이야기를 몇 시간이고 떠들 수 있는 친구가 있어서 더 더욱 정겨운 고향이 아니겠는가.

 

도동 거리를 스쳐가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누구이며 어디에서 왔는지 몰라도 그래도 이름까지 기억해 낼 수 있는 어르신들과 나를 알아보는 선후배가 있어서 고향에 온 느낌을 실감할 수 있다.

몇 년 전에는 저동리의 박정희장군 기념비 앞쪽으로 가는데 왠 할머니가 주뼛주뼛하면서 나를 확인하려 했고 우린 옛날의 기억만으로 서로를 정확하게 확인하였다.

 

그곳에 그리운 옛 사람이 있었기 때문은 아닐까?

청장년 시절을 거치며 서로 사랑했던 연인과 산과 들로 다니면서 데이트라도 한 경험이 있다면 더욱 금상첨화(錦上添花)일 것이다.

이미 이만큼 와 버린 세월 속에서 옛 연인들과의 아련한 추억이 마음 한구석에 남아 있어 이를 확인하고 싶은 것도 하나의 이유일지도 모르겠다. 앞이 캄캄한 미래에 서로를 정 하나만으로 의지하고 미래를 꿈꾸다 어느 날 갑자기 연락선으로 떠나버린 수 많은 연인들의 잔영이 부두와 마을 구석구석에 깔려있어 이의 채취를 맡는 것도 하나의 이유일지도 모른다.

한쪽은 육지에서 한쪽은 고향에서 각자 다른 삶을 살고 있어도 혹시나 우연히 고향에서 만나게 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은 또 어떨까?

 

내게 아직도  그리움이 남아있어 이 골목 저 골목을 거닐면서 내 젊은 날의 초상을 그려보는 것이 진정 고향은 아닐지 …………

 

2011-12-2